[퍼스트 펭귄] 24. 사라졌던 우리 밀의 재발견
스토리 / by NPO지원센터 / 2019.04.23
'퍼스트 펭귄 캠페인'은 펭귄 무리 중에서 제일 먼저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에게 용기를 주는 ‘퍼스트 펭귄’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처음 목소리를 낸 시민들과 '공익단체'들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들의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함께 응원해주세요! 본 기획연재는 카카오같이가치와 서울시NPO지원센터가 함께 합니다. 





'분식의 날'을 아시나요?


한국인의 주식인 쌀. 과거의 우리에게 쌀은 늘 부족했습니다. 생산량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쌀농사를 더 지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던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라며 쌀을 덜먹기를 강요했고 쌀 외의 잡곡을 혼합한 혼분식을 장려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이런 정책은 해방 이후에도 비슷했습니다. 1956년부터 미국의 잉여농산물, 즉 미국에서 팔고 남은 밀 등의 잡곡이 수입되면서 혼분식장려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분식의 날' 장려 정부 메시지가 담긴 1972년 동아일보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혼분식장려운동에 적극적이었고 급기야 1967년부터는 혼분식을 강제하기에 이릅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고 '분식의 날'이 지정되었으며 모든 음식점은 밥에 보리쌀이나 면을 25% 이상 혼합해서 판매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서울식 설렁탕에 국수가 들어간 이유이기도 합니다. 

1967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혼분식을 강제한 결과 국민들도 점점 빵과 면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잉여농산물로 무상원조를 받던 미국산 밀가루를 본격적으로 수입하게 되는데, 1976년 수입된 밀은 170만 톤에 달했습니다.

 
1976년 분식을 장려하는 문구가 포함된 밀가루, 제빵회사의 광고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대한민국 토종 밀의 종자를 찾아서 

우리나라에도 토종 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토종 밀의 생산을 확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미국의 밀가루 원조를 받았습니다. 미국산 밀은 토종 밀보다 더 정제되어 있어 달고 고운 가루를 냅니다. 정부 정책은 미국산 밀에 의존하였고 급기야 1984년부터 정부는 국산 밀을 더 이상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밀을 생산하는 농부들이 있었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이 시름이 커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산물 수입개방 1호가 바로 밀이었습니다. 밀 수입을 시작으로 수많은 수입농산물들이 들이닥치게 되면 국내 농업 모두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수매를 중단해버리자,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우리 밀을 지켜야겠다는 각성이 일어납니다. 

밀은 우리에게 귀한 작물이었습니다. 잔치 때나 국수를 먹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문헌에 등장하는 밀이, 미국의 밀수입으로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밀을 지키기 위한 노력]



1987년, 카톨릭농민회원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밀 종자를 찾아냅니다. 경남 합천에 있는 대평마을에서 '김석호' 생산자가 밀 수매 중단 이후 첫 파종을 시작합니다. 농촌진흥청에 연구용 종자는 있었지만 땅에 심을 수 있는 종자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몇 명의 농민들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농촌의 노인들이 약재나 식량으로 준비해 두었던 밀 종자를 조금씩 받았습니다. 

전국을 헤매며 받아낸 밀 종자는 24kg였습니다. 이 씨앗을 1989년 9월 경남 고성 두호마을 24농가 1만 5백 평의 밭에 뿌렸습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우리 밀을 살리기 위한 노력

1990년 7월 30일 우리 밀의 첫 수확이 있었습니다. 40kg짜리 240가마를 생산했습니다.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꾸려지고 본격적인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시작합니다. 1991년 명동성당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 창립총회를 갖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1,954명의 발기인이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은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었지만, 수입밀이 거의 미국산이었기 때문에 반미운동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창립대회 관련 동아일보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우리밀살리기운동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사실 많이 팔리진 않았습니다. 밀가루는 동네 방앗간에서 가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더 큰 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공하는데 돈이 많이 들고 까다롭습니다. 또한 미국산 밀가루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우리 밀의 거친 느낌과 밀 특유의 곡물 냄새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우리 밀이 소비자들에게는 비싸고 거친 곡물이었던 겁니다. 

30년에 걸친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수입 밀가루에 GMO 변형 밀이 뒤섞여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우리 밀 선호도가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밀은 고유의 풍미와 특별한 식감이 있습니다. 하얗게 정제된 수입밀보다 약간 누런빛을 띄고 독특한 향미가 있는 우리 밀가루를 접해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리 밀을 찾습니다. 

진정한 먹거리 독립을 위해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우리나라 밀의 자급률은 0%에서 시작해, 2016년에 1%까지 도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3.8%로 OECD 34개국 중 자급률이 낮은 편입니다. 밀의 자급률은 1%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에너지원의 11%를 차지합니다. 사람들이 먹는 밀의 대부분이 미국과 호주산 수입 밀입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은 건강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수입한 작물들은 아무래도 가공 과정에서 여러 가지 첨가물이 들어가기도 하고 우리에게 오는 시간이 오래 걸려 신선도도 떨어집니다. 수확을 하고 가까운 곳에서 자라는 먹거리를 먹는 것은 결과적으로 환경을 지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농산물이 움직일 때마다 탄소발자국이 늘어나기 때문이죠. 수입 밀은 산지로부터 우리의 식탁까지 오는데 1달에서 2달의 시간이 걸리지만, 우리 밀은 10일이면 충분합니다.


우리 밀의 모습
(출처 : 지리산닷컴)

우리밀살리기운동은 이 땅을 살리고 이 땅의 고유한 정신을 이어나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 정책에 따라 농업을 접었다 살렸다 하는 임시방책은 농민들을 괴롭히고, 결국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을 초래합니다. 농사짓기 힘든 나라는 식량 자급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IMF 때, 원 달러 환율이 크게 올라 수입밀의 가격이 두 배로 급등해 역으로 우리 밀이 인기를 끌기도 했었지요. 
 
식량자급률이 낮아지면 농산물 안전과 국민 건강이 위협받습니다. 먹거리와 종자는 먹거리 차원을 넘어서 한 나라를 지키는 버팀목이 됩니다.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의 먹거리 문화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신권화정 (사단법인 시민 사무국장)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 우리말이 있는 곳 찾아보기 : https://goo.gl/6NXn5y
​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 http://www.woorimil.or.kr/


작성자 : NPO지원센터, 작성일 : 2019.04.23, 조회수 : 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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