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시작 – 이것은 명백한 인재다
2007년 12월 6일 오후 2시 50분, 인천대교를 공사 중이던 삼성중공업의 크레인부선은 거제도로 출항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크레인부선의 이름은 삼성1호. 만 2천톤 급의 동력이 없는 바지선입니다. 동력이 없기 때문에 2대의 다른 선박이 예인선이 되어 삼성1호를 쇠줄로 연결하여 거제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인천을 출발할 때 4m 이상의 파랑주의보가 예보되는 등 기상이 좋지 않았지만 삼성중공업은 출항을 강행하였습니다. 삼성1호는 서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날 저녁 7시 18분에 홍콩 선박인 허베이스피릿호가 태안반도 만리포 북서방 8km 지점에 닻을 내리고 대산항에 입항하기 위해 정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오일뱅크에 가져다 줄 기름을 실은 146,800톤급의 배입니다. 어민들의 고기잡이 구역으로 주민들이 거기다 닻을 내리지 말라고 늘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또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허베이스피릿호는 현대오일뱅크 해상계류시설로 안내해줄 선박을 기다렸습니다.
다음날 7일 새벽 4시, 서해상 남중부에 풍랑주의보가 울렸습니다. 삼성1호를 끌고 가던 예인선 두 대가 휘청거리다 예정항로를 이탈했고 오전 6시 30분에는 예인선과 삼성1호를 연결하고 있던 강철 와이어가 끊어졌습니다. 삼성1호는 파도를 따라 떠내려갔고, 그 방향은 허베이스피릿호를 향했습니다.
허베이스피릿호 충돌 전의 삼성1호가 이동하던 모습
(일러스트 : 이한비)
정박해있던 허베이스피릿호는 삼성1호를 발견했습니다. 2대의 삼성중공업 예인선에 연락을 취했지만 답을 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허베이스피릿호는 기관 이상으로 방향을 틀지 못했습니다. 대산항 해양청에서도 삼성1호가 떠내려 간다는 걸 알고 충돌위험 경고를 보냈지만 삼성중공업의 선박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크레인을 실은 삼성1호는 통제불능이 되었고, 파도에 휩쓸린 삼성1호는 결국 허베이스피릿호와 충돌하였습니다.
[허베이스피릿호 유류오염사고의 과정]
인재를 막는데 실패했다
허베이스피릿호는 기름을 잔뜩 실은 유조선이었습니다. 1992년 국제해사기구에서 개정한 해상오염방지규칙에 따라 1993년 7월 이후로 계약하는 유조선은 이중으로 선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허베이스피릿호는 선체가 이중이 아닌 단일선체였지만, 그 이전에 계약을 한 선박이라 잠시 유예기간이었습니다. 유조선으로 계약을 한 현대오일뱅크도 이중 선체가 아니라는 것에 크게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허베이스피릿호는 삼성1호와 충돌해 겨우 30㎝짜리 구멍 두 개와 1m짜리 구멍 한 개가 뚫렸습니다만 12,527㎘의 원유가 바다로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풍랑이 거센 날이었습니다. 3미터의 파도가 치고 14~18m/h의 강풍이 불었습니다. 해양경찰청에서 급파한 200톤에서 500톤 규모의 방제정(해양 오염 시, 방제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선박)은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해양수산부에서 정한 ‘유류 오염 대응 매뉴얼’에 의하면 유조선 주변에 기름이 더 확산되지 않도록 오일 펜스를 3겹으로 둘러쳐야 하지만, 한쪽 면에 일자로 간신히 1겹의 오일펜스를 두른 게 전부였습니다. 오후가 되자 기상은 더 악화되었고 5시에 모든 해상방제활동을 중단하고 방제활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민들의 자원봉사 물결
바람이 세게 분다는 건 물결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조건이 됩니다. 바다 위에 띠를 두른 기름이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태안군과 서산군을 넘어서 이 오염은 12월 17일에는 군산까지, 12월 27일에는 영광까지, 1월에는 신안과 추자도, 적은 양이지만 제주도에까지 미쳤으며 북쪽으로는 안면도까지 원유가 퍼져나갔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한 어부들이 기름을 걷어내려고 나섰습니다. 사고가 터지자 환경단체인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은 방제활동 시민참여단을 구성했습니다. 정부를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안이 급박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한 사람이라도 빨리 해안가로 달려가 기름이 더 퍼지지 않게 막아야 했습니다. 이미 오염된 바닷가에 살고 있던 조개며 작은 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 방제작업
가까운 천수만은 겨울철새들이 쉬었다 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어민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태안반도로 달려간 환경 단체들은 시민들의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결하고자 의견을 모았습니다.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기름유출로 인한 서해안의 상황을 시시각각 점검했습니다. 정부의 유화제 살포가 2차 피해를 낳지 않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시민들이 각지에서 앞다투어 태안에 도착했습니다. 흰 방제복을 입은 시민들은 일일이 손으로 바닷가에 자갈을 닦아냈습니다. 기름투성이가 된 채 한 겨울에 땀을 쏟았습니다. 자갈을 끓는 물에 넣어 기름을 닦아 내기도 했고 고압살수를 이용해 기름을 걷어내 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은 전국에서 끝도 없이 몰려왔습니다. 자발적으로 태안반도에서 기름 방제작업을 한 자원봉사자는 연인원 백만 명에 육박합니다. 10년이 걸려도 회복이 불가능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평가와 달리, 소리 없이 자원봉사를 하러 내려온 시민 모두가 퍼스트 펭귄이 되어 방제작업은 두 달 만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습니다.
태안 앞바다를 살리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은 정부의 방제작업을 모니터링하고 자원봉사에 대한 언론의 과잉대응을 지켜보면서 사건의 핵심을 짚어냈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샌가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삼성1호 – 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
삼성중공업은 피해지역에 보상과 발전기금을 출연하기로 결정하고 대국민 사과문도 발표했으나 2016년이 되어서야 차츰 이루어졌습니다. 사고의 당사자들은 법원에서 짧게는 8월에서 길게는 2년 6월의 징역형을, 삼성중공업과 허베이스피릿 선박 주식회사는 각각 벌금 3천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사고 해안에서 기름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민들은 기름 때문에 전복과 미역, 다시마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닷속은 이미 회복이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조류가 바뀔 때면 타르 덩어리들이 해안가로 밀려오기도 합니다. 현지 주민들의 건강상태도 사고 이후 악화되었습니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대기업의 선박이 충돌한 사고로 10년 넘게 바다는 회복되지 못했고 주민들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수천 억의 배상금이 세월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환경 단체들은 해양환경생태계의 복원과 이에 대한 체계적 지원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이 원유유출사고를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라고 부릅니다. 지역명을 넣어 사건사고의 이름을 명명하면, 사람들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인식하며 이 사고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지지적 행동 의지가 적어지는 양상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어떤 선박 사고도 지역의 이름을 넣어 사고를 호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고의 공식적인 이름은 ‘삼성-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입니다. 사고의 이름이 둔갑하면서 원인을 제공한 기업은 책임을 피해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태안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삶 터의 이름 대신 사건의 책임자를 불러내 주세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이 사고의 이름은 ‘삼성-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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