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펭귄] 23. 먹거리로 세상을 잇는 푸드뱅크
'퍼스트 펭귄 캠페인'은 펭귄 무리 중에서 제일 먼저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에게 용기를 주는 ‘퍼스트 펭귄’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처음 목소리를 낸 시민들과 '공익단체'들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들의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함께 응원해주세요! 본 기획연재는 카카오같이가치와 서울시NPO지원센터가 함께 합니다. 스토리 / by NPO지원센터 / 2019.04.23
음식으로 세상을 연결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진열대가 있습니다. 비슷한 식품들이 나란히 줄을 서 있네요. 보통의 슈퍼마켓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모든 물건이 있진 않지만, 우리가 평소에 자주 접하는 식료품들이 보입니다. 냉장고에는 냉동식품과 김치도 있는데 김치는 기성제품이 아니네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담아 계산대에서 돈을 내지 않고 신분증만 확인하고 그냥 갑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여기는 푸드뱅크(Food Bank)입니다. 푸드뱅크는 늘 음식이 넘치는 세상과 음식이 부족한 세상을 연결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푸드뱅크를 매개로 서로 다른 세상이 연결되는 일,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관악 푸드뱅크의 모습 (사진 : 이하나)
푸드뱅크의 시작
1967년 미국의 자원봉사자 'John Vanhangel'에 의해 시작된 푸드뱅크는 생산, 유통,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식품들을 개인과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아 가난한 시설과 개인을 돕는 민간사회복지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1981년에 캐나다로, 1984년에 프랑스로, 1986년에는 독일과 유럽연합으로 확대되었고 한국에서는 199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에서 푸드뱅크 운동이 먼저 시작된 이유는 식품산업과의 연결고리 때문이었습니다. 거대한 식품회사가 쏟아내는 식품들이 넘쳐나고 인스턴트와 통조림이 많은 산업의 특성상, 남은 음식물을 모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좋았습니다. 또한 기부와 자원봉사 문화도 발달되어 있었지요. 반면 한국은 사계절 내내 계절마다 다른 음식을 조리해서 먹고 기부나 봉사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푸드뱅크 운동이 자리 잡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것은 겨울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칼바람에 가정이 해체되고 기업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가정뿐 아니라 지역사회가 해체되었습니다. 서울역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노숙인이 넘쳐났고 일자리를 잃은 어른들의 아이들은 친척 집으로, 보육원으로 내몰렸습니다.
1998년 9월 음식은행에 관련된 한겨레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성공회는 온 나라에 불어닥친 가난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즉각 공익단체들을 찾아 모으고 '먹거리나누기운동협의회'를 조직해 보건복지부에 푸드뱅크 사업을 설명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에는 대부분의 중산층이 몰락하고 서민들이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지만, 여전히 풍족하게 음식을 먹고 버리는 세상도 존재했습니다. 성공회와 공익단체들이 시작한 푸드뱅크 사업은 시민들과 정부가 함께 협력하는 형태이길 바랐으나, 먼저 정부에서 발 빠르게 이 사업을 정부 차원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정부가 주도한 푸드뱅크 사업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정착도 쉬웠습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복지정책은 푸드뱅크 고유의 자발성과 공동체성을 실현하기 어려웠습니다. 푸드뱅크는 기부자에게는 남는 먹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고,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는 이 사회의 이름 모를 사람이 나를 위해 먹을 것을 나누어 준 것처럼 세상엔 아직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되 가난을 증명하지 않도록, 혜택을 받되 수치심이 아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푸드뱅크의 목표입니다.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 푸드뱅크의 히스토리]
성공회와 힘을 모은 공익단체들은 정부 주도의 공식적인 국가 푸드뱅크 사업을 지지하면서도 민간의 자율적 의지를 모아 원래 푸드뱅크의 취지인 공동체의 결합을 꾀하는 노력을 지속해왔습니다.
정부 주도의 푸드뱅크는 전국푸드뱅크 1개소, 광역푸드뱅크 17개소, 기초푸드뱅크 335개소, 푸드마켓 130개소 등 501개소가 있고 식품기탁 규모도 상당히 크지만 정부 정책과 예산에 기대고 있습니다. 반면 민간의 푸드뱅크는 원래의 철학을 잘 살려내는 데는 적합하지만 예산과 인력, 사업 인프라를 확장하지 못해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성공회 푸드뱅크가 하는 일
나눔,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는 일
민간주도의 푸드뱅크는 여전히 매일 12,000명의 이웃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문화된 시설과 시스템을 확보하지 못해 대부분 교회나 기관의 부설 사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만, 모금행사와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정동국밥'이라는 음식점을 열어 수익을 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푸드뱅크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푸드뱅크의 고정 이용자로 정착해 먹을거리에 대한 가계 부담이 줄면서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푸드뱅크 이용자들이 주도적으로 함께 같이 밥을 지어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부엌의 형태로 발전한 경우도 있습니다.
추석을 맞아 함께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
관악푸드뱅크 은빛사랑회원들 (사진 : 이하나)
불우한 이웃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생각은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조건을 갖춘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이 만나는 접점이 없다면 각자의 세상은 더 편협하게 고립될 것입니다. 내가 만나지 못했던 세상을 '음식'으로 이어주는 푸드뱅크. 그 누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눔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김한승 (성공회푸드뱅크 대표)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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