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펭귄] 09. 미인대회는 왜 공중파에서 사라졌을까?
'퍼스트 펭귄 캠페인'은 펭귄 무리 중에서 제일 먼저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에게 용기를 주는 ‘퍼스트 펭귄’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처음 목소리를 낸 시민들과 '공익단체'들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들의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함께 응원해주세요! 본 기획연재는 카카오같이가치와 서울시NPO지원센터가 함께 합니다.스토리 / by NPO지원센터 / 2019.04.09
지덕체를 갖춘 여성을 뽑는다고요?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참가자에게 묻습니다.
“데이트를 하다 보면 식사를 하러 갈 수 있잖아요?
밥 속에 돌이 들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먼저 얌전하게 빼내고요.
애인한테도 조심하라고 얘기해줄 거예요.”
대답을 하는 여성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어떤 자리일까요? 바로 1987년 미스코리아선발대회 결선입니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기억하시나요? (출처 : shutterstock)
수영복을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부풀린 머리를 한 여성들이 긴장된 발걸음으로 무대 위를 걷습니다.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온몸을 곧게 펴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뽑는 미스코리아 대회.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만 18세 이상,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고졸 이상의 지덕체를 겸비한 여성을 선발하는 것이 미스코리아 대회의 기준이었습니다.
1996년의 미스코리아 대회 선발기준 중 일부를 뽑아보면 이렇습니다.
- 얼굴이 크지 않아야 하며, 양 어깨가 넓으면 안 되고 어깨선이 부드러워야 한다.
- 가슴의 크기, 위치, 선 그리고 엉덩이의 사이즈, 선, 모양을 고려한다.
- 몸에 상처가 있거나 큰 점이 있으면 안 된다.
이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은 대회 주관사에서 결정했습니다. 지덕체를 가진 여성을 뽑는다면서 신체적 기준을 특정하게 맞춰놓은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만 18세 이상의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성을 뽑는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만이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일까요?
사람을 잣대에 놓고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는 미스코리아선발대회. 게다가 후보자들의 신체조건을 평가하기 위해 여성들이 파란색의 동일한 수영복을 입고 몸매를 뽐내기도 했습니다. TV 채널이 몇 안되던 2000년대 이전, 미스코리아 대회는 매년 전국으로 생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기를 든 퍼스트 펭귄들이 있었습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와 그에 대한 반대 운동]
미스코리아가 뭐길래
미스코리아 대회는 1957년 한국일보사의 주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공개적으로 외모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여성의 미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부모들이 참가를 만류했다는데요. 이후 1972년부터 공중파에 생중계되면서 미스코리아 대회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미스코리아에 뽑힌 여성이 바로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풍토가 생기자 대회의 경쟁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여성유권자 연맹은 미인대회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여성단체들이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1989년 여성신문에서는 “노예시장 같은 미인대회를 차 버리자 – 미스코리아 대회는 굴욕적이고 반여성적인 추태”라고 논평을 하기도 했지요.
물론 주최 측은 외모만으로 미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선발된 여성들은 하나같이 서구적 기준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수치와 외양으로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일에 돈까지 끼어들자, 미스코리아 대회는 더 이상의 명분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여성들에게 번호와 점수를 매겨 외모를 평가하는 미인대회
미스코리아를 시작으로 전국에는 각종 미인 선발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역특산품과 연결시킨 OO 미인 선발대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농산물을 들고 있는 여성들의 사진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이러한 미인대회들은 대부분 미스코리아 선발기준을 비슷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미인대회에서 선발되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 기준에 맞춰 자기 외모를 바꿔나가기도 했습니다. 키가 커야 하고 날씬해야 하며 몸에 상처가 없고 피부가 매끄러워야만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걸까요? 여성의 기준이 외모에 집중되기 시작하자 초등학생들도 장래희망을 '미스코리아'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미인대회를 반대한다
미스코리아가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경쟁이 심화되자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특정 미용실에서 수천만 원을 받고 미스코리아 대회를 준비시키거나 수억 원의 뒷돈이 오고 갔다는 비리가 밝혀지고 나이와 학력을 위조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1993년 심사위원들의 뇌물수수 사건이 드러나자 미스코리아 대회를 반대하는 여론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단체연합은 성명서를 냈습니다.
“돈거래로 얼룩져 세계무대에 나갈
한국미인을 선발한다는 명분도 잃었으며,
여성의 상품화를 부추기는 대회를 폐지하라”
대회도 대회지만, 매년 미스코리아 대회는 공중파를 통해 전야제부터 본 대회까지 모두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1996년 여성단체연합은 MBC 방송국 앞에서 방송 중계를 중지하라고 시위를 하였고 1999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이달의 나쁜 방송’으로 MBC의 미스코리아 중계방송을 선정하였습니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획일적 미의 기준, 외모지상주의,
여성상품화, 연예계 등용문으로의 전락 등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공중파 방송사가 이를 생중계해 정당화하고 있다”
1999년 미스코리아 대회 생중계에 대한 경향신문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미스코리아 반대 움직임을, 남성들은 ‘못생긴 여자들의 질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비웃기도 했는데요. 이를 통해, 미의 기준을 미스코리아의 기준에 이미 맞춰버린 대중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라고?!
1999년 페미니스트 매거진 '이프'는 미스코리아 대회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개최하였고, 이 행사는 2009년까지 매 해 열렸습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에서는 기존의 미스코리아 대회에 맞서 정형화된 미인이 아닌 행사 취지에 적극 동의하는 사람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를 통해 10살 된 어린이, 20대 남학생, 트랜스젠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 여성 축구 선수, 남자 간호사 등 획일화된 미의 기준이 아닌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였습니다.
1999년 1회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에 대한 한겨레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당시 방송인 홍석천 씨, 영화감독 변영주 씨, 가수 백지영 씨 등 유명인들의 참여도 이어져 많은 시민들에게 관심을 받았고, 그 취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였습니다.
결국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오랫동안 생중계했던 MBC도 내부 비평 프로그램을 통해 미스코리아 대회 방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고 2001년 MBC가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2002년부터 미스코리아 대회는 공중파에서 중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퍼스트 펭귄들이 10년 넘게 싸워 얻은 작은 결과였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2000년대 후반에는 문화관광부의 요청으로 지역 미인대회가 하나씩 폐지되었습니다. 미인대회가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자 미인대회 반대에 대한 목소리도 조금 줄어들었는데요. 대신 여성의 성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여성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식도 일반화되었습니다.
성형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들
(출처 : 여성민우회 트위터)
하지만 지금도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대중문화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심지어 성형수술을 통해 외모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시민단체들의 폐지 요구로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습니다.
날씬하고 얼굴이 예쁜 여성만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어느 누구도 외모를 포함한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각자의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중받는 날까지, 퍼스트 펭귄들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박수연 (서울시NPO지원센터)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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