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받은 무죄 선고
1974년 2월, 울릉도를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잡혔습니다. 전북대 교수 이성희 씨를 포함해 간첩활동으로 잡힌 47명의 사람들 중에는 60대의 주부, 40대의 농부들이 있었습니다. 그해 3월 경향신문은 간첩단 일망타진 사건을 전하며, 근 10년간 명맥을 이어온 혈연과 지연을 이용한 엄청난 사건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논평은 우리 국민들의 반공의식이 투철하여 간첩단이 맹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해 4월 첫 재판을 받고 같은 해 7월, 다섯 번 이상의 재판을 거쳐 형을 받게 됩니다. 전영관, 김용득(55, 무직), 전영복(42), 이성희(47, 전북대 교수), 최규식(37, 수의사), 김영권(39, 농업)은 사형. 손두익(43, 선장), 서화수(40, 선원), 이사영(34, 사원)은 무기징역. 이 간첩단에는 주부와 어부, 농부, 약사, 목사, 교수, 대학강사, 목수 등 평범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32명 중 6명은 사형선고를 받고 3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23명은 자격정지와 2년 6개월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 판결 보도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40년이 지난 2014년 12월, 이 간첩단의 수장으로 지목되었던 이성희 교수는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간첩이40년이 지나 무죄를 받다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억울한 이름들의 호소
인터넷에서 ‘간첩조작사건’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많은 문서를 볼 수 있습니다. ‘조봉암 사건’부터 이승만 정부의 ‘금정산 사건’, 43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유럽 간첩단 사건’, 2004년 서울시 공무원과 강제 납북되었던 어선의 어부를 간첩으로 몰아간 ‘태영호 사건’, 걸출한 예술인 윤이상, 이응노, 천상병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 판결 하루 만에 혐의자 여덟 명을 사형시킨 ‘인민혁명당 사건’ 등 국가에 의해 조작된 사건뿐 아니라 간첩 혐의를 받아 재심에서도 유죄를 받았으나 혐의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고문이 가해졌던 수많은 사건이 펼쳐집니다.
[70년 이후 국가폭력 사건들과 이를 위한 연대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또는 사형까지 당했던 사람들의 가족들은 서슬 퍼런 독재 치하에서 어떻게든 먼저 간 가족들의 이름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모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이 먼저 이 억울한 일들을 알리고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피해 가족 중심으로 시작된 이 일은 한국의 인권운동으로서 첫 발을 떼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인권운동은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라는 것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억울한 영혼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진 뒤 사람들과 시민단체들은 힘을 모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을 조직합니다.
민가협 장기수가족협의회의 농성관련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나는 울릉도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이 사건에 연루돼 무려 17년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국가폭력희생자 최규식 씨, 울릉도간첩조작사건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을 넘어서
군부독재치하에서 국가폭력은 간첩단조작사건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고문과 은폐 조작 사건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한 번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서슬 퍼런 시국이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어 간첩조작 증언 자료집을 만들고 사람들 앞에 꼿꼿이 서서 국가폭력을 폭로하기 시작합니다.
조작간첩들이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모두가 색안경을 쓰고 봤기 때문에 어떤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한 인권을 지키는 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법적으로 문제 삼고 사실을 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작간첩의 피해자들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오랜 감옥살이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국가폭력희생자들의 편에 서며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기틀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군부독재 시절이 끝나자 고문 피해자 66명은 서울지방검찰청에 '형법상 폭행, 가혹행위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조작 사건에 가담해 고문했던 수사관들을 고소합니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며 이들의 고소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헌법재판소도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국가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계란으로 치던 바위가 깨질 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위해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걸어온 사람들의 걸음은 드디어 2005년 작은 결실을 보게 됩니다. 국가보안법 청문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 청문회를 준비하려면 피해자들이 나서야 했는데, 이들이 겪은 고문 트라우마는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때 정신과 전문의들이 피해자들의 대열에 함께 섭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고문 생존자 박동운 씨와 첫 면담을 가졌습니다. 이 일로 고문치유모임의 힘을 만들어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설립하게 됩니다.
진실의 힘 홈페이지
이때부터 고문 피해자, 국가폭력희생자들의 이름을 다시 쓰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2005년에 설립되었으며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이름 붙은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시작됩니다.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는 한 번 판결을 내린 사건은 다시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2005년을 시작으로 많은 국가폭력희생자들이 재심을 청구하게 되고 하나씩 재심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과 경험이,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닌 사회의 기억으로 공식화되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고통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밑거름이 되고, 사회적 유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동운, 재단법인 진실의힘 이사장)
진실의 힘을 믿는다는 것
2018년 현재, 행정안전부에는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있습니다. 이 지원단은 1996년 거창사건 등 처리지원단으로 시작하여 제주 4.3사건, 노근리사건에 이어 민주화운동보상지원단도 신설합니다. 이 지원단은 2010년‘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일을 이어받아 지금도 대일항쟁기와 제주 4.3사건,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남영동 대공분실
(출처 : 정책브리핑)
진실을 밝히는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최근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받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공권력이 아무 때나 나의 가방을 뒤질 수 없는 세상을 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명예와 시민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권의 사각지대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진실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은 오늘도 역사의 골목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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