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걸다
1992년 3월 22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전국본부 사무실.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스물네 살의 젊은 청년이 마이크 앞에 앉았습니다.
“중대별로 실시된 이번 군 부재자 투표를 앞두고, 남북대화를 하려면 30% 지지율로는 북한이 상대하지 않으니 30% 이상의 지지율이 필요하다며 중대장과 인사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기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지문 중위는 촉망받던 ROTC 장교였습니다. 이 중위는 기자회견 후 자진해서 부대에 복귀하겠다고 밝혔으나 사복을 입은 수도방위사령부(이하 수방사) 군인들이 회견장에 들이닥쳤습니다. 이날의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이지문 중위는 밤 11시 10분쯤 ‘근무지 이탈’을 이유로 수방사 헌병대 소속 수사관 20여 명에 의해 연행되어 흰색 스텔라를 타고 사라졌습니다.
1992년 이지문 중위의 내부고발에 대한 한겨레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이지문 중위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를 폭로한 대가는 컸습니다. 이지문 중위는 대기업에 사전 채용된 상태였으나 파면 당해 군번을 말소 당했고 군사법정에 서기까지 했습니다. 이 중위의 폭로로 군 부재자투표의 부정선거가 사라졌습니다. 한 사람이 순탄할 수 있었던 미래를 포기한 대가로 우리 사회는 큰 소득을 얻었습니다만,이 중위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한 대가
이지문 중위의 내부고발보다 앞서 1990년 10월 4일에는 윤석양 이병이 국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것을 폭로하고 보안사에 연행되었습니다. 서울 양천경찰서의 김석원 경장은 파출소의 불법 촌지 문제를 폭로했으나 음모에 휘말려 파면당했습니다. 국방부 구매 담당관이었던 박대기 씨는 외국 무기 부품 구매의 예산낭비를 제보했는데 명예퇴직 후 스트레스로 인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화 ‘도가니’로 잘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제보자인 전응섭 선생님과 대책 위원회 소속 교사들은 파면, 임용 취소, 감봉 등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부의 부정한 일들을 폭로하면 정의로운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부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고발자들은 고초를 겪고 삶까지 뒤집어야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일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시민단체들은 1994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부의 비리제보자를 지켜라
참여연대는 1994년 내부비리고발자지원센터를 만들고 ‘내부비리제보자 보호 등에 대한 법률’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큰 내부 권력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개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도적 기반이 없는 이상 내부고발자의 보호는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이어 참여연대는 국회의원33명의 서명을 받아 내부고발자 보호 법률 제정 운동에 돌입합니다.
1996년 참여연대는 맑은사회만들기본부를 출범시키며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 2001년 법안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법안만 통과되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비밀준수 의무와 제도 개선을 꾸준히 요청한 결과 2011년 공익신고자보호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부패방지법과 민간분야 공익신고를 다루는 공익신고자보호법이 더해지면서 공익제보자 보호를 위한 기틀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익제보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출처 : 참여연대)
우리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공익제보
2014년 4월 16일, 우리 시대의 큰 아픔으로 남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에 담겨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적폐를 발견합니다. 이 안에 제대로 된 내부고발과 공익제보가 한 건이라도 있었다면, 미리 참사의 원인을 단 하나라도 제거했다면 이런 비극은 우리를 비껴갔을지도 모릅니다.
여객선의 잦은 사고, 불법 증축, 상습적 정원 초과 운항에 대해 2014년 1월 청해진 해운의 직원이 정부 조사를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결국 불법적인 일을 계속해오던 세월호는 4월 16일 출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공익제보자 52인과 공익제보 관련 5개 시민사회단체(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호루라기재단, 한국투명성기구, 공익제보자와함께하는모금)가 함께 공동선언을 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공익제보를 활성화하는 것만이 대형 재난과 참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안전장치라는 걸 알렸습니다.
(출처 : 참여연대)
다행히도 2015년, 공익신고자보호법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합리적 의심에 따른 신고 인정, 보호조치 이행강제금 부과, 양벌규정 도입이 개선되었고 사립학교 부패행위도 신고할 수 있도록 부패방지법도 개정되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떳떳하게 칭찬받는 세상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해서 중요한 제보를 했던 K스포츠재단 전 사무총장 정현식씨를 비롯해 당시 국정 농단의 주요 사건들은 모두 내부자들을 통해 폭로되었습니다. 또한 가장 가깝게는 불법 촬영물 거래를 허용하던 웹하드계의 거물이 구속 수사된 것도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공익제보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불법적이고 추악한 일일수록 비밀을 유지하려는 장치들이 많습니다. 이런 장치를 깨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공익제보자의 신분이 더욱 확실히 보호받아야 하며 이들이 가져오는 사회 전체의 공익적 가치에 대해 시민들의 공감과 지지가 더욱 필요합니다. 아직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공익제보자들과 옳은 일을 하고도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용기 있는 의인들을 위해 오늘도 퍼스트 펭귄들은 양심의 호루라기를 힘껏 불고 있습니다.
▶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 http://www.peoplepower21.org/Whistleb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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