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빈곤 : 소비자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 (두번째)
NPO보고서 및 연구자료 / by Wooyoung Park / 작성일 : 2015.09.18 / 수정일 : 2020.06.18

PART 2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


복지국가는 어떤 의미에서 돌이킬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복지국가와 함께 공존할 수 없으며, 복지국가 없이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이 바로 모순이다. 복지국가는 구성원 모두가 결핍과 결핍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실업이 조장하는 무위도식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부장해야한다. 충분한 수입이 없더라도 궁핍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소득을 유지하는 사회 보장이다.


하지만 선택적복지 처럼 도움이 가장 필요한 이를 자산조사를 통해 선정하여 도움을 집중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모습과 전혀 가깝지 않다. 두려움이 이미 그 해로움을 다 끼친 뒤에, 두려운 사건이었던 결핍과 무위도식이 현실로 변화한 뒤에야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선택적복지의 종합적 결과는 통합이 아니라 분리이고, 포용이 아니고 배제이다. 납세가 적은 시민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고서는 철저하게 주류에서 몰아낸다. 소비자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실패자란 낙인을 찍음으로써, 대다수는 자신의 삶을 성공담으로 생각하며, 우월한 이들의 참된가치, 추정가치가 재확인된다. ‘관찰자들은 타인을 건설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건설한다. ‘

이것이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정치적 빈곤화와 시민일반의 정치적 관심의 소멸이다.


신 보수주의 엘리트의 등장

가시적 약자라고 합의할 만한 극빈측을 ‘원조’ 대상으로 선택하면서 대립했을지도 모르는 많은 이해관계와 압력이 상쇄되도록 ‘중층결정’ 되었다.


복지국가는 ‘노동의 영구적 재상품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고용 가능한 노동력을 자본주의 산업에 꾸준히 공급하였다. 산업 ‘예비군’이 언제든 현역으로 근무할 수 있게 늘 준비된 상태로 유지했다. 하지만 오늘날 잉여노동력은 결코 다시 상품이 될 수 없다. 질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 수요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기업은 규제받지 않고 노동의 유연성과 국경없는 이동의 자유와 함께, 예비노동력을 보충하려는 지역적 책임감에서 자유로워 졌다. 지역 커뮤니티와 호흡하며 소비자 욕망을 불러일으킬 필요 없이, 미숙련의 유연하고 순진한 노동력의 처녀지가 아직도 세계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기업인은 더 이상 지역적이어서는 안되었다.




만족한 다수가 만드는 불평등

중간범위의 유권자들은 자시들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더 잘살게 되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이 구매하는 보험이 국가가 제공하는 평균이하의 낮은 서비스보다 훨씬 낫다고 믿는다. 공공복지의 수준과 장점이 하루아침에 추락할 수 있으며, 그만큼의 돈가치를 하지 못한다. 복지는 날이 갈수록 하층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열악한 프로그램’이라는 이미지가 쌓인다. 복지지원을 신청하는 건 실패의 상징이 되며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복지급여의 신청은 매우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모든 대안이 그 질 과 상관없이 훨씬 합리적이고 바람직해 보인다.



노동윤리와 새로운 빈곤층


노동은 부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부유한 국가로 나아가는 동시에 개인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였다. 이 진리가 노동윤리를 형성하였고 존속되는 이유는 빈곤층과 복지에 미치는 유익성 때문보다 빈곤하지 않은 이들에게 미치는 공리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술진보란 ‘인원감축’을 뜻하며 노동력을 컴퓨터가 대체하는 걸 의미한다. 경영진이 일자리 4만개 감축을 발표한 날 기업의 주가는 급 상승한다.


단순노동자들에게 습득하기 어렵고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이 요구되지 않기에 쉽게 고용되고 버려진다. 어떠한 ‘방해 능력’도 교섭능력도 없으며 투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 고용의 단절은 되풀이 되지만 고용자체는 늘 되풀이 되지 않는다. 일터는 여전히 생계의 원천이지만 삶의 의미는 아니다. 전문가다운 능력에서 생겨났던 자부심은 이제 쇼핑능력에서 생겨난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더이상 쌍방의 의존적 관계가 아니며, 구직자들이 지역에서 터전을 꾸리는 것과 다르게 자본은 지역의 노동시장에 의지 하지 않고 제약 없이 이동할 수 있다.

고용주의 스펙트럼에 가까운 엘리트들의 부는 ‘유동자산’과 같은 지식에 능통하며, 교묘함, 결코 약속을 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을 태도를 띈다.


실업에서 잉여로

자본의 유동성은 언제든 고용의 불안정과 불확실성이라는 망령을 만들었다. 실업이 일시적 상태를 뜻한다면 ‘장기 실업’ 더 정확하게는 잉여의 (Redundancy : 정리해보, 과잉에 따른 중복) 재앙이 발생하고 있다.

실업은 Un Employment로 고용의 정상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였다. 다시 경기가 회복되어 생산자 계층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실업자’와 달리, ‘잉여’는 남아도는 것, 과잉, 불필요한 것이다. 잉여는 대차대조표에 차변에 기입되며, 사회적 부를 증대시킬 수 없고 비용을 증가시키는 ‘자원낭비의 원인’이자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문제’이다.

노동윤리가 더이 상 산업의 욕구를 반영하지 않으며, 국가의 부의 열쇠라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지만 탈산업사회인 소비자사회에서 노동윤리가 수행하는 기능이 있다. 바로 원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과 자격이 없는 빈민이 구별되고,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비난이 집중되며, 사회가 그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합리하 된다. 빈고은 개인의 결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사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해진다. 더 이상 가난을 줄이는 방법은 공급하지 않지만 노동윤리는 사회가 빈곤층의 영속을 받아들이게 도운다.






작성자 : Wooyoung Park / 작성일 : 2015.09.18 / 수정일 : 2020.06.18 / 조회수 : 14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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