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정말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기획아카이브 / by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 작성일 : 2024.12.18 / 수정일 : 2024.12.23
우린 정말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1. 베트남 사회적기업 ‘떠해’의 고민
“찌(Chi, 베트남에서 손위 여성을 부르는 호칭) 유리! 우리 여기 한국 단체랑 일해야 할까요? 우리 이 정도 큰돈은 필요 없는데…….”
베트남 하노이의 오래된 사회적기업 ‘떠해(Tohe)’의 운영진 중 한 명이 내 앞에 앉아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한국의 한 엔지오에서 KOICA 사업 제안서에 함께 넣을 현지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떠해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2006년 설립된 떠해는 장애 아동 등 취약계층 아동에게 미술교육을 하고 그 아이들의 그림으로 디자인 상품을 만들어 판 뒤, 그 수익으로 아이들에게 저작권료를 지원하고 다시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이다. 또한 자폐 청소년들을 위한 창의 미술 교실과 그 작품의 전시 등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하노이에서는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도시형 예술 축제를 조직하고, 베트남 지방 곳곳에서는 아이들과 환경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그야말로 전천후의 사회적기업이다.
(사진: 2024년 11월, 하노이 어린이궁전. 떠해와 함께하는 베트남 자폐 청소년, 청년 작가들의 그림 전시)
한국의 엔지오가 KOICA 사업을 위해 현지 파트너에게 제안하는 것들은 떠해의 입장에서는 꽤 큰 규모의 활동들이며 무엇보다 그간 해온 것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들이었다. 떠해는 이 제안을 따른다면 그동안 작지만 알차게 꾸려가고 있던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베트남에서 아주 강력한 봉쇄가 있었던 COVID-19 시기를 지나며 베트남의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떠해는 서로의 임금을 조금씩 줄여가며 함께 견뎠고, 그 와중에서도 고유의 가치를 지켜내려 애썼다. 기금에 의해 활동이 좌지우지되는 한국과는 달리 애초부터 정부나 다른 기관의 큰 지원 없이도 19년간 스스로 조금씩 성장해 온 활동이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떠해는 더욱 단단해져서 결국 외부에서 내미는 큰 기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 단체의 제안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답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만약 돈이 있다면 어떤 걸 하고 싶어요?’ 이번엔 내가 다시 물었다.
한국 단체의 제안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답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만약 돈이 있다면 어떤 걸 하고 싶어요?’ 이번엔 내가 다시 물었다.
“가장 필요한 건 임대료죠. 자폐 청소년과 자폐 청년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곳이 우리 매장 겸, 사무실 겸, 워크숍 공간인데 사실 너무 협소해요. 만약 근처에 조금 큰 공간으로 옮기면 더 많은 워크숍을 열 수 있고, 더 다양한 아이들과 재미난 실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어디 공간만 지원해 줄 수 있는 곳은 없을까요? KOICA에서는 그런 거 안 해주나요?”
“그러게요. 떠해에서 이렇게나 잘하고 있는데, 활동은 그대로 하게 두고 임대료만 딱 지원해 주는 기금이 어디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임대료 말고는 어떤 지원이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올해부터 새로 하는 비영리 활동 중에 발달 장애 아동 센터에서 자애 아동들과 진행하는 창의 미술 수업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우리의 비용을 들여 여러 센터에서 무료로 진행해 봤고, 지금은 아주 최소한의 비용만 받으며 몇 개의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하고 있어요. 사실 다른 센터로 더 확장하고 싶어도 센터나 부모들이 한 교실의 한 달 수업료인 100만 동(6만 원) 정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어려운 곳이 많아요. 찌 유리, 딱 이 정도만 지원해 줄 곳은 어디 없을까요?”
하노이는 물가 대비 임대료가 너무 비싼 동네다. 베트남에는 떠해처럼 딱 임대료만, 딱 활동에 필요한 작은 기금 정도만 있으면 알아서 아주 신명 나게 재미난 일을 벌일 친구들이 참 많다. 하지만 정작 외부에서 가지고 오는 건 그게 아니니 참 아쉽다.
2. 사랑 기금은 없나요?
하노이시 장애 청년회가 하노이 시내 한 대학 안에 대학생들이 만들어 직접 운영 중인 식당 겸 카페에 모이기로 했다. 식당에서 조용한 회의 공간으로 내준 곳은 공교롭게도 2층이었다. 대부분 지체 장애를 가진 5명의 장애 청년이 가파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청년회 안에는 대학생이 거의 없었다. 베트남에서 장애인들에게 대학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하노이시 내 각 군의 장애 청년을 대표하는 자리인 만큼 다양한 아이디어가 오갔다. 장애 청년들이 운영하는 마사지숍과 네일숍의 확장, 장애인을 채용하는 해산물 가공업과 분재 사업의 확대 등.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아이디어는 ‘장애 청년들을 위한 커뮤니티 카페’였다.
(사진 : 매년 열리는 베트남 청각장애 공동체의 행사
올해도 모두가 모일 실내 공간을 구하느라 애를 썼지만 결국 한여름 무더위 아래 야외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귀한 행사가 아니면 베트남에서 장애 청년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는 건 쉽지 않다.)
올해도 모두가 모일 실내 공간을 구하느라 애를 썼지만 결국 한여름 무더위 아래 야외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귀한 행사가 아니면 베트남에서 장애 청년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는 건 쉽지 않다.)
“장애 청년들은 갈 데가 없어요. 새 친구를 사귈 곳도 교류할 곳도 없죠. 그러니 연애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아요. 성교육 등의 정보도 부족합니다. 장애 청년들에게 연애와 결혼은 직업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베트남에서 장애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가끔 나는 스스로가 국제개발협력 활동가인지 장애 관련 베트남 시민사회 활동가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물론 두 가지가 완전하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때론 ‘국제개발’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거대함과 거리감은 ‘현장에서 당사자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잊게 만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도 참 둔감했다.
한 베트남 장애 청년의 아이디어처럼 장애 청년들에게 문턱 없는 커뮤니티 공간에서 장애 청년과 비장애 청년이 만나 교류하고, 장애 당사자를 전문가로 키워 다른 장애 청년이 마음을 터놓고 상담할 수 있게 하고, 비장애인들이 하는 것처럼 다양한 워크숍과 세미나도 열고, 그곳에서 장애 청년들이 누군가를 만나 자유로이 연애하고 사랑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커뮤니티 카페가 오늘 모인 이 청년들이 있는 각 군마다 있다면 어떨까? 그간의 국제개발 현장에서 장애 청년들을 위한 활동들은 대부분 직업재활 등 경제적 자립에 더 큰 초점을 두었지 심리적, 사회적 자립에는 그만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취업만큼 중요한 게 사랑이라는데, 사랑을 지원해 줄 기금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3. ‘커피숍’과 ‘미용실’과 ‘네일 케어’의 의미를 아시나요?
‘슈퍼맨 가족 자원봉사 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베트남의 뇌병변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2017년 ‘CPFAV(베트남 뇌병변 아동 가족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 서로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동체는 금세 커져서 베트남 전국의 63개 지역에 촘촘한 네트워크 가지게 되었고 현재는 뇌 병변 장애를 가진 아동 및 성인 4,500명 이상, 뇌병변 장애를 가진 아동의 부모 5,000명 이상, 그리고 전문가 및 사회 자원봉사자인 500명이 함께하고 있다.
베트남 북부에서 가장 큰 공립 어린이 병원이자 하노이 유일의 ‘중앙 어린이 병원’에서 몇백 미터가 채 안 되는 곳에 CPFAV의 사무실 겸 활동 공간이 있다. 지하와 옥상을 포함한 7층짜리 작은 건물에는 층마다 다른 활동이 있다. 예를 들어 5층과 6층 옥상에는 응급 및 일반 진료 혹은 초기 진단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중앙 어린이 병원’으로 모이는 뇌병변 장애아동과 그 가족들을 위한 무료 쉼터가 있다. 공간을 둘러싸여 배치된 몇 개의 낡은 침상과 침구 중 하나에 어린 남자아이가 누워있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그 누나와 아빠가 그 옆에 앉아 있다. 반대편 벽의 작은 책장엔 어딘가에서 제본해서 돌려보느라 이미 너덜너덜해진 부모 교육 지침서 몇 권이 놓여있고, 그 아래 바닥 매트에는 몸에 잔뜩 힘을 준 아이들이 장난감 몇 개를 앞에 두고 누워있다. 한 엄마가 그 아이들을 돌보는 사이, 다른 한 엄마는 기본적인 조리시설이 있는 옥탑에서 장 봐온 재료들로 간단한 식사 준비를 한다. 옥상에는 세탁기와 빨랫줄이 있고, 하얀 스티로폼 안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채소 모종이 자라나고 있었다.
(사진: '하노이 중앙 어린이 병원'에서 진단 및 치료를 받기 위해 베트남 각지에서 올라오는 '뇌병변 장애 아동과 가족들'의 쉼터.
누구든 무료로 이용 가능한 이 보금자리에서 명절을 맞아 여러 가족이 모여 베트남 전통음식을 만들고 있다.)
누구든 무료로 이용 가능한 이 보금자리에서 명절을 맞아 여러 가족이 모여 베트남 전통음식을 만들고 있다.)
아이의 병원 진료와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만겁의 시간 동안 이곳은 다른 선배 보호자들에게서 아이의 장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위로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따듯한 품이 된다. 쉼터는 한 달까지 머물 수 있는 ‘무료 숙소’라는 경제적 지원 이상으로 심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만약 아이가 병원에서 초기 진단을 받게 되면 단체는 작은 지원금을 전한다. 액수가 병원비를 보태줄 만큼 크지도 않고 일회성 지원이지만,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가족들에겐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4층에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의 물류를 관리하는 작은 창고와 사무실이 있다. 이곳에선 다양한 활동이 운영되는데, 먼저 외부 전문가의 온오프라인 부모 교육과 부모 심리 상담이 있다. 오래 동안 심리 상담을 받은 보호자는 다시 상담사가 되어 신규 보호자를 코칭 해주기도 한다. 아직 활발하지는 못하지만, 국제 교류에도 관심이 많다. 외국에서 초대해 주는 뇌병변 관련 컨퍼런스에 베트남의 대표로서 열심히 참여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뇌병변 전문가인 한 외국인 의사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몇 아이의 수술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또한 매년 베트남의 학생 및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뇌병변 장애 인식 개선 캠페인’을 연다. 캠페인을 통해 베트남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보내온 ‘초록 카드’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초록’은 국제적으로 뇌병변 장애를 의미한다.
이 밖에도 단체에서는 저소득층이거나 소수민족 혹은 산간 오지 지역에 거주 중인 장애 청년 혹은 장애 가족들이 각자 지속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돕기 위해 소액 지원 및 이자 없는 소액 대출을 한다. 그 작은 지원으로 한 엄마는 아침에 길거리에서 쏘이(찹쌀밥) 장사를 시작했고, 한 가정은 집 앞에 사탕수수즙 짜는 기계를 구비해 놓았으며, 한 아빠는 키워서 팔기 위해 자기 땅에 묘목을 가득 심었고, 한 청년은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기 위한 재료를 샀다. 모두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는 비즈니스는 아니었지만 장애 아동의 돌봄과 동시에 일정의 수익을 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3층의 문을 열자, 뇌병변 장애 전용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몇 명의 아이와 일체형 책걸상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몇 명의 아이가 보였다. 자유자재로 가누기 어려운 아이들의 몸은 대부분 한쪽 벽에 붙여진 칠판을 향해 있었다. 절반은 이 동네 아이들, 절반은 단체 직원들의 아이들이었다. 이들을 돌보고 있는 선생님은 역시 뇌병변 장애 아동의 부모였고, 약간의 교사 교육을 받으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곳은 공식적인 인가 교육기관도 아니었으며, 아이들의 장애와 소통 능력은 다양했고, 선생님 역량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특수교육 프로그램은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계속 말을 걸고, 노래를 불러주고, 밥을 먹이고, 가끔 한두 아이들에게 숫자나 글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 공간은 베트남의 뇌병변 장애아동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정말로 꿈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공식적인 인가 교육기관도 아니었으며, 아이들의 장애와 소통 능력은 다양했고, 선생님 역량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특수교육 프로그램은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계속 말을 걸고, 노래를 불러주고, 밥을 먹이고, 가끔 한두 아이들에게 숫자나 글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 공간은 베트남의 뇌병변 장애아동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정말로 꿈같은 곳이었다.
한 엄마는 이곳을 알기 전까지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몇 년간 매일 같이 집 앞 공원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베트남 뇌병변 장애 아동들의 95%가 학교에 가지 못하니 아마 많은 보호자가 아이와 함께 이렇게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마침, 가까운 거리에 사는 한 아빠가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늦은 등원을 시켰다. 반나절 정도 아이를 맡긴다고 했다. 이 공간 덕분에 엄마 아빠들은 아이를 두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병원비를 위한 가계소득에 보탬이 되었다. 점점 커가는 아이의 몸에, 이 24시간의 돌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지쳐가는 보호자들도 몇 시간이고 아이를 이곳에 맡겼다.
대부분 장애 아동의 주 돌봄 담당자는 엄마였다. 엄마들은 집에 아이를 봐줄 사람을 들이려고도 해보고, 이웃집이나 친척 집에 잠시 맡겨 보기도 했지만, 중증 장애가 있는 아이를 맘 편히 맡길 곳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내 아이의 장애와 보호자의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같은 장애 아동 엄마들이 돌봄 교사로 있기에 더 마음 편히 맡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얻게 된 꿈같은 자유시간 동안 엄마들은 커피숍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미용실을 가거나 네일 케어를 받는 등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단 몇 시간의 쉼과 충전으로 엄마들은 다시 아이를 돌볼 힘을 얻었다. 만약 이조차도 없다면 공공의 돌봄 서비스가 전혀 마련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엄마들은 쉽게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들이 커피숍과 미용실과 네일 케어를 받는 시간은 이들의 활동에서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건 이 활동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이 모두 장애 아동을 돌봐온 엄마들이기에 더 공감할 수 있는 발상이다.
베트남에서는 뇌병변 장애아동 중 5%가 채 되지 않는 비율로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추정된다. 베트남에서는 이걸 통합교육이라 부르지만, 사실 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재, 특수교사, 평가, 시설 및 서비스 등 지원이 거의 없다. 그러니 경증의 뇌병변 장애 아동만이 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가서도 아이들은 비장애 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그래서 단체 건물의 2층에는 대학생 및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중심으로 주말 교실이 운영된다. 자원봉사자들은 아이들에게 보충 학습을 지원하고, 외출이 어려운 아이들과 함께 외부 탐방을 가며, 진로 교육 등의 활동을 한다. 또한 이 공간에서는 16세 이상의 뇌병변 장애 청소년 및 청년들의 동아리도 운영된다.
1층에서는 단체의 경제적 지속을 위해 만든 ‘Go Green’이라는 사회적기업의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이 회사에서는 뇌병변 장애 아동 및 장애 성년들이 주로 먹을 수 있는 보충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반 지하 공간에는 또 다른 사회적기업인 ‘뻐꾸기 둥지(TỔ CHIM CÚC CU)’가 있다. 이곳에선 장애인 및 취약계층이 생산하는 협동 농장의 식료품 등의 온/오프라인 판매를 한다. 이 조그만 점포에는 뇌병변 성인 장애인들, 혹은 뇌병변 장애 아동의 엄마들이 채용되어 일하고 있다. 파트 타임 근무자가 많은 것은 취약한 뇌병변 장애인들의 건강 상태와 돌봄 중인 장애 아동 보호자의 근무 가능한 시간을 고려한 것이다. CPFAV는 전국의 여러 지역에 뻐꾸기 둥지의 지점을 확산하여 더 많은 뇌병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둥지가 되어주고자 한다.
CPFAV는 베트남 회사 등의 여러 후원처를 찾아 각 층에서 필요한 활동에 대한 임대료 및 약간의 활동비를 매년 지원받고 있다. 임대료조차 층별로 분리해서 분산 후원을 받는 이유는 만약 1년씩 지원하는 후원들이 끊기고 새 후원처를 바로 찾지 못했을 때 단체의 활동 전체가 흔들리는 걸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후원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간 올해 후원과 내년 후원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생긴 적은 있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후원이 끊긴 적은 없었다. 층마다의 재정은 여유롭지 않지만, 활동만큼은 하나같이 모두 장애 당사자나 그 가족들에게 실직적으로 매우 필요한 것들이다. 장애 아동들의 부모들이 모여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올해 후원과 내년 후원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생긴 적은 있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후원이 끊긴 적은 없었다. 층마다의 재정은 여유롭지 않지만, 활동만큼은 하나같이 모두 장애 당사자나 그 가족들에게 실직적으로 매우 필요한 것들이다. 장애 아동들의 부모들이 모여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큰 기금 없이도 이렇게까지 찐하게 활동하며 단체를 키워나갈 수 있는 건 당사자들의 수요가 얼마나 잘 반영되어 있는가 하는 진정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CPFAV 직원들이 입고 있는 초록색의 유니폼에 단체의 슬로건이 눈에 띈다. ‘Never leave a child behind!’ 장애가 있는 내 아이를 뒤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부모의 책임감’, 그리고 다른 장애 아동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활동가의 책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끝/
최유리
15년차 베트남 하노이안 활동가.
국제개발협력 및 사회적기업 분야의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가 현재는 베트남의 장애 분야 엔지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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