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여전히 ’질병‘취급을 받는 게임
학창 시절, 아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삶을 살길 바라셨던 필자의 아버지는 항상 ’게임은 백해무익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게임을 정말 좋아함에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게임을 많이 할 수 없게 됐다. 공부는 고사하고 밖에 나가 햇빛이라도 많이 쬐면 좋을 텐데,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느냐 밥도 먹으러 나가지 않는 자녀의 모습을 보면 ’게임중독은 질병이고, 게임은 해롭구나‘라는 생각이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다. 부모는 자녀의 게임 이용 시간을 제한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반대로 자녀는 부모의 눈치를 피해 몰래 컴퓨터를 하는 ’몰컴‘사례는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기성 세대는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게임 중독을 하나의 질병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흔하다. 2019년 리얼미터의 '게임 중독의 질병 지정에 대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지정하자는 질문에 20대와 30대는 반대가 더 많았지만, 40대 이상은 전부 찬성 여론이 더 높았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한때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만큼 강력하게 자녀 게임시간을 제한하는 제도인 ’셧다운제‘입법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지금은 완화됐다) .
또한, 게임 및 게임 커뮤니티는 여러 사회 문제와 연관되어 이슈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남성 혐오 표현이 의도적으로 여러 굵직한 한국 게임 콘텐츠에 삽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관련 애니메이터가 해고되는 등 논란이 뜨겁다. 게임은 중독성이 크고, 사회에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게임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게임을 즐길까?
1. “e스포츠는 스포츠입니다”
흔히 여러 전자기기를 통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Electronic sports, 줄여서 e스포츠로 부르곤 한다. 한국에서 e스포츠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다. 즉, 한국에서 e스포츠라는 개념은 20년 넘게 활발히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e스포츠도 스포츠야?‘ 라는 대중의 차가운 시선은 꾸준했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몸을 움직여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해, e스포츠는 컴퓨터 등으로 경기가 치러지며 상대적으로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경우, 경기 규칙을 잘 몰라도 선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만, 게임은 규칙을 잘 모르는 경우 컴퓨터를 조작하는 선수의 모습과 알 수 없는 영상만이 대중에게 각인된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e스포츠는 스포츠인가?‘라는 질문은 2023년에 치러진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리그오브레전드(LOL) 선수들에게도 돌아왔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으로, 질문의 답변은 이 게임의 10년 넘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내, 국제대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페이커(본명 : 이상혁)선수가 답했다. 페이커는 “경기를 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많은 분께 좋은 영향을 끼치고, 경쟁하는 모습이 영감을 일으킨다면 그게 스포츠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라며 “금메달을 따는 모습이 많은 분께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한국 팀들이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좋지만 중국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 아시안게임에서 무조건 우승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리그오브레전드 팀은 다른 스포츠도 해외 선수들이 귀국해서 함께 훈련하듯이 국가대항전을 위해 중국에 있던 두 선수까지 불러들이며 한국 선수들은 함께 훈련했고, 그 결과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리그오브레전드 외에도 아시안게임 e스포츠 분야에 도전했던 선수들은 국내 여러 전문가들과 선수들의 노력으로 참여한 모든 분야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그 중 다른 e스포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스트리트 파이터5의 경우, 한국의 여러 게이머들이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었는데, 심지어 어떤 게이머들은 이제 게임을 하지 않는데도 감독의 도움 요청에 의해 따로 시간을 내어 훈련을 도왔다는 훈훈한 일화도 있었다.
최근에 국내에서 치뤄진 리그오브레전드 세계대회(이하 롤드컵) 우승 일화 역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영감을 주었다. 이번 롤드컵 우승팀인 T1은 작년 롤드컵에서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는데, 결승전에서 그 유명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밈의 주인공인, 프로게이머 인생 10년만에 처음으로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김혁규(데프트)선수가 속한 DRX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선수 명단 교체 없이 1년동안 열심히 해왔지만, 지속적인 국내 대회 준우승, 에이스 멤버였던 페이커의 손목 부상 등으로 인해 10팀 중 5등까지 내려가는 등 불안한 1년을 겪었다. 하지만 페이커가 돌아오고 심기일전하여 롤드컵에 국내 팀 중 2등의 성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치러진 만큼 한국팀의 선전을 기대했지만, T1을 제외한 모든 팀이 8강에서 떨어지고 중국 팀들과 T1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T1, 페이커는 중국 팀을 상대로 한 번도 (매치에서)진 적이 없었고, 강력한 팀들을 꺾으며 결국 작년 준우승 멤버 그대로 롤드컵에서 우승하는 서사를 보였다. T1과 페이커는 2016년 이후 7년만에 다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롤드컵은 세계 기준 누적 시청자 4억명, 결승전 동시 시청자 수 1억명을 넘어서며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e스포츠 팬들에게 큰 감동과 영광을 줬다. 리그 오브 레전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임에서 다양한 대회가 진행중이며, 스포츠와 같은 감동과 영감을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2. 백종원, 슈카월드, 승우아빠의 공통점은?
게임은 단순히 프로 단계에서만 스포츠가 아니다. 게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 다른 사람과의 협력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려 역량을 잘 발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운동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연습, 공부가 필요한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노력과 지능 등 많은 역량이 필요한데,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백종원, 슈카월드, 승우아빠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물론, 이 셋은 글을 작성하는 시점 기준 10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세 명은 유튜브를 시작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셋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라는 게임의 ’공대장‘출신이다. WOW라는 게임은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0~40명이 도전해야 하는데, 이들은 ’공격대‘라고 불렸다. ’공대장‘은 이 ’공격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사람이다.
공격대는 목표에 따라 특정 장소에 들어가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몇 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도 걸리곤 했다. 목표를 위한 여정이 오래 걸리는 만큼 크고 작은 여러 보상이 주어지지만, 단순히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여러 역할과 능력을 가진 공대원들을 어떤 일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공대장의 판단과 책임이 상당히 중요하다. 목표 해결뿐만 아니라, 공대장은 공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들을 고려하고 관리해야 한다. 적절한 인재를 공대원으로 스카우트하는 일, 예비 인원을 충당하는 일, 해결해야 할 목표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 대해 공대원들에게 숙지시켜야 하는 일, 공대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소한 분쟁부터 목표 달성 후 주어지는 보상을 분배하는 문제까지. 그렇다. WOW라는 게임의 공대장 역할은 크게는 회사의 CEO, 작게는 한 조직의 리더 역할을 능숙히 수행할 수 있어야지만 임명되고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임에서의 능력이 실제 채용과도 연관됐던 일화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백종원이 자신의 공대원이었던 인물을 자기 회사에 채용했던 것이다. 같이 하던 공대원이 취업을 위해 게임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자, 평소 해당 공대원의 직무 수행 능력을 높게 산 백종원이 바로 본인의 회사에 들어오라고 한 일화다. 이외에도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책임자(COO)였던 스테판 질렛은 입사 과정에서 자신의 WOW 공대장 경험을 스타벅스 CEO에게 이력으로 진지하게 어필하였다. 현실 이력서에서 게임 실적을 작성하기엔 아직까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게임을 잘 하기 위한 역량이 회사 등 사회에 필요한 역량임은 증명됐다.
WOW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회에 필요한 역량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소개한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약 30분간 진행되는 게임 한 판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같은 팀인 나머지 4명과 함께 소통하여야 하고, 게임을 잘 하기 위해 평상시에 여러 가지 공부해야 한다. 또한, 30분이라는 시간을 빈틈 없이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게임의 결과에 따라 변동하는 랭크 점수, 일종의 성적표는 게이머들로 하여금 노력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게임에 너무 몰입하지만 않는다면, 게임을 잘 하기 위한 여러 역량과 노력은 일을 잘 하기 위한 역량, 삶의 목표를 이루는 역량과 연결된다.
3. 게임,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앞서 게임을 통해 경쟁하는 ’e스포츠‘가 또 다른 ’스포츠‘임을 강조했다면, 이번에는 관점을 바꿔 게임이라는 장르의 예술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현대 사회에서 게임은 여러 가지로 구성된다. 게임은 화면에 출력되는 배경과 캐릭터를 위한 디자인이 필요하고, 게임을 구성하는 소리, 전자기기에서 동작하기 위한 개발 작업, 게임 전반을 관통하는 스토리 등으로 구성된다. 놀랍게도, 이런 구성 요소들은 고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슈퍼마리오‘에도 모두 다 있다. 우리가 보는 슈퍼마리오 화면, 슈퍼마리오가 점프할 때의 소리, 개발 작업, 그리고 납치된 공주를 슈퍼마리오가 구하러 간다는 서사까지. 게임을 구성하는 이 다채로운 요소들은 영화, 뮤지컬, 소설 등의 예술 작품들의 구성 요소와 많이 겹치고, 같은 맥락으로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게임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 요소 중에서도 게임이 예술이라고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스토리‘에 있다. 스토리가 좋은 여러 게임이 있지만, 스토리가 좋아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라스트 오브 어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10년 전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게임은 전염병으로 망해가는 사회에서,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면역자인 ’엘리‘를 특정 장소로 데려가는 ’조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여러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조엘은 엘리를 죽은 ’딸‘처럼 여기게 된다.
게임의 결말 부분에서 세계의 전염병 치료를 위해 엘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다. 긴 서사를 거치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이 만연하여 붕괴된 세상의 모습에도 공감하고, 동시에 조엘과 엘리의 가족과도 같은 유대 관계에도 몰입하게 되며, 세상을 구할 것인지 엘리를 구할 것인지 갈등하게 된다. 결국 조엘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대신 ’자신에게 소중한 소수‘, 즉 엘리의 생명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누군가를 이긴다거나 강력한 적을 해치우는 재미를 넘어, 여러 게임에서는 제작사가 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게임‘이라는 방식의 스토리 몰입을 통해 전달한다.
사회적 메시지 뿐만 아니라, 게임 제작사는 감동 역시 게임의 스토리를 통해 전달한다. 최근에 국산 인디게임(적은 규모의 제작팀이 만든 게임)으로 출시되어 크게 호평을 받고 있는 ’산나비‘는 탄탄한 스토리와 기막힌 연출 덕분에 감동받은 플레이어가 많다. 올해 나온 게임으로 스토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게임을 플레이해본 후기가 대부분 ’눈물이 났다‘ ’울었다‘로 시작하는 것만 보더라도 상당히 감동적임을 알 수 있다(필자 역시 펑펑 울었다). 게임이 단순 오락거리를 넘어, 메시지와 감동에 몰입하게 하는 ’예술 작품‘이라면 이 역시 게임이 가지는 하나의 선한 사회적 영향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4. ‘게이머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냐는 생각이 드느냐’
20년 전인 2003년, ’아침마당‘이라는 공중파 프로그램에 e스포츠 부흥의 주인공이자 전설적인 선수로 남은 ’임요환‘선수가 초대된 적이 있다. 당시 임요환 선수가 진행자에게 받았던 질문은 황당한 게 많지만, 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질문 하나를 꼽자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느냐‘였다. 그 당시 얼마나 게임에 대해 사회가 부정적이고 편협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질문이었다.
YTN 속보 이미지
지금은 방송에서 프로게이머, 게임에 대한 취급이 많이 바뀌었다. SBS 유튜브채널 ’스브스뉴스‘에서는 롤드컵 결승 3시간 전, 클템(이현우) 해설을 불러 게임이나 대회에 대한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올해 T1 롤드컵 우승 당시에는 위에 이미지처럼 YTN에서 실시간으로 우승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는 유명한 프로게이머 ’페이커‘뿐만 아니라, 격투게임 철권의 전설로 불리는 ’무릎‘ 배재민 선수를 게스트로 초대하며 프로게이머에 대한 관심을 표했다. 20년 사이,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했는지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임‘은 그 안에 정말 많은 종류가 존재하고, 몇몇 게임은 직접 해보지 않거나 꾸준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게임이 사회에 가지는 긍정적 의미는 스포츠 장르와 예술 장르의 장점이 섞여 있는, 잠재력이 높은 분야다.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코로나 시대가 겹치며 최근 5년간 게임 이용률은 67.2%에서 74.4%로 올랐다. 앞으로 게임이라는 분야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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