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 강제징용 재일조선인의 집성촌, 우토로 마을을 기억합니다
현안과이슈 / by khoco / 작성일 : 2022.03.30 / 수정일 : 2022.03.31
잊히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직 국가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소수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 다양한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낯선 타지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현지에 적응해가야 했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 담긴 긍지를 추적하고 싶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위치한 우토로(ウトロ) 마을과 그 디지털 아카이브를 주제로, 재일조선인에 관해 다룹니다. 앞으로도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다룰 계획입니다. 관련된 기관, 단체의 노력과 캠페인, 감춰진 역사, 아카이브 등을 소개합니다. |
코리안 디아스포라,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나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사전적 의미로 자의나 타의로 본래 거주하던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거주지를 형성하는 것 혹은 집단을 의미합니다. 이는’흩뿌리다’, ‘퍼트리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유래했는데요, 이들은 대개 이주한 새로운 땅에서도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소수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재일조선인일텐데요. 도교경제대학 교수이자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재일조선인이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을 말합니다.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식민지 시절부터 돈벌이 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병합을 기점으로 조선인들에 일본 국적을 강제했다가, 패전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기점으로 조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습니다. 게다가 해방 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 남과 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이들의 법적 신분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재일 조선인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모두 보호받지 못하고 여전히 ‘조선인’으로 남은 이유입니다.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식민지 시절부터 돈벌이 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병합을 기점으로 조선인들에 일본 국적을 강제했다가, 패전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기점으로 조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습니다. 게다가 해방 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 남과 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이들의 법적 신분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재일 조선인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모두 보호받지 못하고 여전히 ‘조선인’으로 남은 이유입니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서 새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인 재일 한국인과 ‘한국 국적’이 아닌 ‘조선적’을 가진 재일 조선인은 모두 2010년 기준 60만 명 안팎이고, 이중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8.15 해방 이전부터 살고 있는 조선인과 그 자손은 40만 여명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입니다.
재일 조선인을 향한 탐탁지 않은 시선과 차별적인 인식이 일본 내에 존재해왔고 이런 인식이 공공연히 드러날 때도 많았습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자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일본 전역을 떠돌았습니다.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절도나 폭행 등 범죄를 저지른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내 외국인 혐오가 처음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던 당일, 조선인이 무언가 음모를 꾸리고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일본인들이 6천 여명 이상의 조선인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에선 식민지 통치의 결과로 일본 내 거주하게 된 식민지인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암묵적으로 용인했습니다.
(출처: 우토로 디지털 아카이브)
일제 징용 조선인들의 마지막 집단촌, 우토르
20세기 중반 식민지 시절, 일본 내 재일조선인들이 오랜 기간 살아왔던 우토로 마을도 비슷한 아픔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마을과 조선인들의 흔적을 없애기로 결정합니다. 이 마을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토로 마을의 역사는 1941년 제 2차 세계 대전 중 교토 군 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함바(はん-ば)라 불리는 임시 합숙소에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살면 징병이나 다른 지역으로의 징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조선인이 이 마을로 모여들었고, 패전 후에도 일본 각지에 거주하던 조선인들도 우토로 마을로 차츰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어 학교를 세우고 그 자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토로 주민들에게는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고도 성장을 겪을 시기에도 상수도시설 하나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끊임없는 토지 분쟁을 겪었습니다. 미 점령군의 주민 강제 퇴거 시도를 시작으로, 우로로 토지 소유권자였던 닛산이 서일본식산이란 기업에 토지를 매각하면서, 서일본식산은 주민 상대로 ‘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해 주민들을 마을에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일본인 활동가들 중심으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해 우토로 지키기에 나섰으나, 결국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주민들의 강제 퇴거 확정이 판결되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조선인 주민들이 우토로를 떠났고 건축물이 무너졌으며 결국 2015년 기준으로 150여 명의 주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우토로에 거주해왔던 주민들이 강제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2005년 한국 시민단체들 중심으로 ‘역사 청산! 거주권 보장! 우토로 국제대책회의’를 발족했습니다. 아름다운 재단 등은 ‘우토로 땅 매입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캠페인이 결실이 되어 2010년 주민회는 ‘우토로 민간기금재단’을 설립, 우토로 땅 832평을 매입해 주민들의 거주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beautifulfund.org/utoro/
아름다운 재단은 ‘기억할게 우토로’캠페인을 벌여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습니다. 우토로 마을이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모금 후 지구촌동포연대/우토로 민간재단(당시 김수환 대표), 동아대 촬영팀과 협력하여 헬리캠, 드론, VR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마을 풍경 영상’을 기록하고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별 마을 지도와 가구별 실측 평면도 등을 수집하는 등의 기록화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이 되어 올해 4월 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한편 ‘디지털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우토로 마을 디지털 아카이브 사이트를 제작해 많은 이들이 우토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재외동포 재단과 아름다운 재단의 후원, 아카이브랩의 기술지원을 받아 제작된 우토로 디지털 아카이브 사이트 링크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토로 디지털 아카이브 링크
(출처: 우토르 디지털 아카이브)
지구촌동포연대(대표 배덕호)는 우토로평화기념관 전시콘텐츠 구축 일환으로 관련 기록물, 유물을 수집하고 이를 목록화했는데요. 현지 유물이나 기록물을 모으고, 영상물 22건은 국가기록원 복제복원 사업을 통해 디지털화했습니다. 또 우토로 마을 형성기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타임라인을 개발하여 마을 내 주요 인물과 단체정보 등을 콘텐츠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물과 콘텐츠들을 기반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에는 총 약 6,800건의 기록물이 수집되었으며 그 중 사이트를 통해 공개한 기록물은 580여건입니다. 덧붙여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는 우토로 마을 형성기부터 현재까지에 관련한 타임라인, 2020년에 작고한 우토로 재일조선인 1세 강경남 할머니의 생애사 및 추모글, 마을만들기 운동에 대한 사이토 마사키 활동가의 글, 디지털역사지도, 구술기록, 우토로방화사건에 대한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콘텐츠들과 관련된 기록물들 역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기록을 모으는 동시에 수집된 기록물을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게끔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년 10부터 기록물 기증사이트를 오픈하여 기록물 기증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카이브를 둘러보면 우토로 마을 기록화 사업 과정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활동가 나카야마 가즈히로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우토로 마을 기록 작업, 그리고 이 작업물들의 기증이 있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우토로 마을을 위한 한, 일 시민단체의 노력에 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심도 있게 다뤄보고 싶습니다.
“우토로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토로 평화 전시관 개관을 준비중이던 2021년 8월 방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2세의 일본인 극우 청년의 방화로 인해 주변 가옥과 창고 등 건물 7채가 소각되어, 원래 우토로 평화기념관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기록자료 약 50점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는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한국이 싫었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아직 일본 사회 내에 재일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있음을 반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토로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간 활용된 많은 입간판들도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이 입간판들에는 우토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토르 아카이브 측은 올해 3월 21일 ‘인종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우토로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실물은 비록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사진 기록을 통해 입간판에 담긴 메세지를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차별을 반대하는 우토로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련된 손피켓 양식을 출력한 뒤, 구글 폼에 개재된 입간판 중 하나를 골라, 그 문구를 손피켓에 작성합니다. 이렇게 작성한 피켓을 들고 문구를 읽는 영상을 녹화해 같은 폼에 업로드하면 됩니다. 다음은 해당 구글 폼 링크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우토로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토로 평화 전시관 개관을 준비중이던 2021년 8월 방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2세의 일본인 극우 청년의 방화로 인해 주변 가옥과 창고 등 건물 7채가 소각되어, 원래 우토로 평화기념관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기록자료 약 50점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는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한국이 싫었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아직 일본 사회 내에 재일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있음을 반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토로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간 활용된 많은 입간판들도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이 입간판들에는 우토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토르 아카이브 측은 올해 3월 21일 ‘인종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우토로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실물은 비록 소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사진 기록을 통해 입간판에 담긴 메세지를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차별을 반대하는 우토로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련된 손피켓 양식을 출력한 뒤, 구글 폼에 개재된 입간판 중 하나를 골라, 그 문구를 손피켓에 작성합니다. 이렇게 작성한 피켓을 들고 문구를 읽는 영상을 녹화해 같은 폼에 업로드하면 됩니다. 다음은 해당 구글 폼 링크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캠페인참여안내]우토로를 지키는 목소리를 보내주세요
(출처: 우토로 디지털 아카이브)
함께 읽어보면 좋을 기사
한겨례21, '우토로 마을이 보여준 '작은 통일'의 힘'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45290.html
프레시안, '참거나, 싸우거나...지거나, 이기거나'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84766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 모임http://utoro.or.kr/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
서경식,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반비, 2012
코멘트를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