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디아스포라에 관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합니다. 우선 선정한 두 편의 작품은 각각 재일조선인, 고려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에 관한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직접 쫓아가 찾아뵈며 이야기를 청해 듣는 구술 작업 및 다큐를 비롯한 창작 작업들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에 관한 다양한 예술 작품 및 매체들을 소개해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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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조선사람입니다>(2021, 김철민)
(출처: 미디어피아http://www.mediapi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564)
처음 소개할 다큐멘터리는 재일조선인을 조명하고 있는 2021년 개봉작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유튜브 영화를 찜해놓은 뒤 관련 감독 시사회 영상을 찾아 보다가 서경식 교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이라는 책을 소개받은 것도 그 영상 속 감독의 추천이었습니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뒤, 역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서경식 교수의 강연 영상을 찾았고, 오마이뉴스tv에서 진행한 강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아직 강연 도중 서경식 교수가 했던 말을 잊지 못하는데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일본에 가 있던 조선인 3만명이 죽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진해에 일본 군함기지가 있었는데, 라고 운을 띄우면서 그는 강연을 듣고 있던 한국인 방청객들에게 물었습니다. 진해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면 그것이 한국사가 되었을 테지만, 히로시마에 떨어졌으니 일본사인 것인가?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역사에 대해 말할 때 국가를 주어로만 본다면 저 같은 이들, 디아스포라라고 일컫는 국적을 잃을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식민지 시절부터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을 건너다녔지만 어느샌가 이 나라에선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이 되었고, 지금은 원래부터 외부에 있던 사람인양 오해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해방 후에도 분단과 전쟁, 가정사와 경제적 곤란 등으로 일본에 남게 된 이들의 생애를 구술과 영상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김철민 감독은 2002년 평양에서 처음으로 재일조선인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거의 15년간 재일조선인을 만나 영상에 담아왔습니다. 이 영화는 그 기간의 결실입니다. ‘재일조선인’이란 칭호에서 그들의 삶의 일부, 어찌 보면 정체성이라 할 만한 속성이 묻어나는 데요. 식민지 정책의 결과이기도 한 이들 재일조선인은 일본 내륙에서 해방을 맞은 후에도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차차 귀국 준비를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여력이 되는 많은 수의 재일조선인이 귀국 행렬을 이루긴 했지만 그렇지 못한 조선인들도 다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돌아갈 채비를 하기 위해 조선학교를 건립해 아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해나가던 이들에게 분단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란이 들이닥쳤고, 이들의 조국은 남과 북이라는 분단 이전의 조선 땅이라는 기억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선 사람’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본 내에서 민족 교육과 한반도 통일, 독재 타도, 민주주의 등 정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죠.
이들을 괴롭게 하던 일은 내륙 사정이라기보다 일본 사회에 팽배한 차별과 혐오였습니다. 주기적으로 조선 학교를 급습해 ‘바퀴벌레’, ‘차별 받기 싫으면 일본에서 떠나라’ 운운하며 조선인들과 그 아이들을 위협했고, 60년대 전후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도 애를 먹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 제도 등 국가적 차원의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 되는 등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멸시의 대상이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에 오고 싶어하던 재일조선인 유학생들 중 일부는 삼엄한 반공주의가 판 치던 국부독재시절 국내에서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허위 자백서를 강요받은 뒤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재일조선인 2세인 강종헌은 인터뷰에서 마지막 자신이 사형 판결되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피고 강종헌과 같은 북한의 간첩은 생존을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구형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말하자면 그는 국내에 들어와서도 간첩이란 누명을 받고 십 수년 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 간첩조작 사건으로 총 21명의 재일조선인이들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수난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그럼에도 ‘조선 사람’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자체로 그대로 인정을 받기 위해 일본 사회에서 사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영상으로나마 접할 수 있던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분노, 두려움, 절망 끝에 다시 돋아난 긍지가 놀랍기도 합니다. 상처는 딱지가 되고 딱지는 다시 훈장이 되는 과정은 돌아봐도 경이롭습니다.
2. <고려아리랑:천산의 디바>(2017, 김소영)
(출처: 한국문학번역원)
두 번째 다큐멘터리는 김소영 감독의 <고려아리랑: 천산의 디바>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세운 조선극장(추후 고려극장으로 명칭이 바뀐다)의 1대 춘향을 맡아 극장의 얼굴 마담으로 활약했던 배우이자 가수 이함덕과 3대 춘향으로 고려인 마을과 전시 부대들을 순회 공연 다니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가수 방 타마라라는 두 여성을 중점으로 고려인 예술가들을 조망하는 작품입니다.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했을 무렵부터, 예술적인 기량이 많은 이들이 모여 극장을 차리고, 이웃들의 타지에서의 쓸쓸함과 고된 심신을 달래주었던 예술가들은, 1937년 스탈린 강제 이주 정책으로 고려인들과 함께 중앙아사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란 사막도시로 끌려갔습니다. 이 시기에도 조선극장 예술가들은 우리 말로 노래, 춤, 연극을 선보이며 고려인들이 머무는 마을 마다 순회 공연을 다니며 많은 이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이동권은 특권이기도 했는데, 덕분에 이들은 이산 가족들 간에 편지와 안부를 전하고 가족을 찾아주는 등의 메신저 역할도 톡톡히 했다고 조선극장 총예술감독이었던 한진은 ‘극장 이상의 극장’이라는 국립조선극장 60돌 회고 기념글에서 적고 있습니다.
그러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극장 단원들은 선전과 선동, 군 부대 위문 등의 명분으로 민족 구분 없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우스베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벼 농사를 짓던 우즈벡 고려인 마을에 머물며 과거 동포 작가들의 작품을 상연했습니다. 크즐오르다에 다시 이사해서야, 대학을 졸업한 곳곳의 젋은 예술가들이 극장에 입단해 명맥을 이었습니다. 1968년 이후 현재까지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와 함께 고려극장도 살 길을 찾아 여러 차례 이주를 감행하면서도 예술 작업과 상연을 그치지 않았고, 많은 동포와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큰 호평을 받아 온 것입니다.
이처럼 고려극장의 역사에 큰 대들보 역할을 한 예술가들의 흔적을 쫓는, 말 그대로 예술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김소영 감독은 오랜 시간 고려인과 디아스포라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의 망명 삼부작이라 불리는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7) 그리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2019)은 조명하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는 다채롭지만 모두 고려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영상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저자와의 대화, 서경식, 오마이뉴스TV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온라인 상영회 2부 행사로 ‘디아스포라 속 여성의 삶과 예술’이란 주제로 김소영 감독, 뮤지션 림 킴, 박민정 소설가를 모시고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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