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광주고려인마을 등의 지원으로 국내에 속속 귀국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고려인들은 2000년대 안팎부터 한국에 입국하여 생활기반을 마련하고 집단거주지를 형성해왔다. 민족적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연해주, 중앙아시아에 이어 국내에서도 여전히 디아스포라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고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흔히 외국인으로 대우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광주고려인마을의 사례를 중점으로 유관 단체의 활동과 현재 진행 중인 복합 아카이브를 포함한 실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 고려인의 역사를 개관해보고 관련 통계를 소개한 후 광주고려인마을 순으로 다뤄본다.
------
1. 고려인의 이주 역사
고려인은 보통 농업,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의 이유로 19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해방 시기까지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현재 이들 한인 교포들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CIS) 내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 고려인. 출처: 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 자료사진)
이민 초기 역사와 강제이주 정책
1860년대 조선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에 정작했던 것이 이주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극심한 가뭄이 닥쳤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던 농민들은 그 이후에도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해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구한말 연해주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항일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연해주 극동 지방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사막도시 크즐오르다로 보내졌다. 이때 연해주, 아무르주, 자바이칼주에 살던 조선인이 무려 17만 여명이었다. 이들은 가져간 삽과 호미로 땅을 파고, 칼바람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면서 혹독한 시기를 이겨냈다.
<고려일보>와 <고려극장>
조선인들은 고국이 해방을 맞을 때에도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조선인들은 국내 사정을 고려해 자신들의 공식 명칭을 조선인에서 ‘고려인’으로 바꾼 후 성실히 각 지역에 적응해갔고, 소련의 국책 사업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8년 소련 전체 노력 영웅 2만 605명 중 조선인이 209명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어신문 <고려일보>와 조선어극장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이 정체성을 유지, 보존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일보는 강제 이주 이후 1938년 설립되어 본래 레닌기치라는 소련공산당 기관지였지만, 작가들이 조선어 작품을 발표하는 등 재소고려인의 유일한 연단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일보로 명칭을 변경한 해는 1991년이다. 고려인 대표 작가 한진의 글(’극장 이상의 극장’, 국립조선극장 60돌 회고, 1992)을 보면, <고려극장>은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창립되었으며, 한인 이주 당시 함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2차 대전 시기 소도시 우스또베로, 다시 크슬오르다(이때 국립극장으로 승격)로 옮겼고, 최종적으론 알마아타에 정착해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60년대 우즈벡 북극성 꼴호즈에서 열린 공연에서 춤추는 고려인. 출처: 정선군)
고려인의 거듭되는 이민
1992년 소련이 붕괴하자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구소련의 넓은 지대는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었다. 그와 동시에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고려인들은 대대적인 차별에 휩싸였다. 그 중 일부는 경제적인 곤란에 떠밀려 연해주 지망으로, 그 중 일부는 한국으로 다시 입국하기도 했다. 이 즈음 국내로 입국한 고려인은 안산, 광주 등 전국 8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강제이주 정책으로 황량한 초원에 내몰린 동포들의 3~4대 후손이었다. 한국은 2007년 중국과 독립국가연합(CIS)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방문취업제도’를 시행했다.
2. 국내 체류 고려인 현황/통계
2020년 법무부 외국국적동포 거소신고 현황을 보면 국내 거소 신고한 외국국적동포 수는 총 464,281명이며, 이 중 고려인은 43,281명이다. 이중 방문취업(H-2) 소지자*가 15,213명, 재외동포(F-4) 소지자가 10,024명이다. 고려인의 산업별 분포를 보면 각각의 체류자격 기준 모두 광제조업 종사 비중이 6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개 기능, 기계조작, 조립 종사자들이 절반 이상이다.
*방문취업제는 2007년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주로 한인 1세대들이 조국으로 귀환하던 경향에서 현재는 3~5세대들까지 귀환하게 되었다. (’광주고려인마을 사람들’,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인구 추이에 있어, 러시아와 CIS 출신 고려인 인구는 매년 증가세이며, 2020년 기준 43, 281명으로 43,138명인 재미동포의 수를 넘어섰다.
고려인은 고려인 밀집지역이 형성된 경기도 안산, 인천, 충남, 광주 등 지역을 기점으로 거주하는 경향. 2010년대 중반까지 40대, 50대 연령이 많았으나 현재는 30대, 20대도 고루 거주하고 있다. 한편 고려인의 체류 자격은 다양하다. 단기방문(C-3), 방문취업(H-2), 방문동거(F-1), 재외동포(F-4), 영주(F-5), 결혼이민(F-6)이 있다. 이중 재외동포 비중(2만 5천 274명)이 가장 크고 그 다음 방문동거, 영주 순으로 구성된다.
3. 광주고려인마을의 역사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사례는 광주 월곡 고려인마을이다.
고려인의 귀환 및 광주 정착 배경
결혼한 딸의 초청으로 2001년 한국에 입국한 고려인 신조야 씨는 2002년 체류기간 만료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 하남공단 일대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지원사업을 벌이던 이천영 목사가 신조야 등 고려인 노동자 임금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고 이는 고려인동포 지원사업의 계기가 되었다. 국제 이주자의 정착촌이 생기는 배경을 <고려인마을사람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외국인에 대한 사회, 문화, 경제적인 진입장벽이 낯은 장소
2. 외국인이 모이면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외국인이 정착
하남공단을 비롯한 광주의 여러 공단들은 정착한 고려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세와 물가에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는 점도 광주 고려인마을로 고려인들이 정착하게 된 배경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이천영 목사와 신조야 씨 등 우주베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이 함께 하고 있는 다양한 네트워크가 이루어져, ‘고려인의 날’ 등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행사와 축제를 꾸려가고 있다. 그 예로 2005년부터 신조야 등은 상담소를 설립하였고, 2009년엔 고려인지원센터로 확장했다. 이후 고려인교회, 어린이집, 2013년엔 고려인마을협동조합, 지역아동센터를 세워 고려인들의 지역사회 적응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해갔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2013년 ‘광주광역시 고려인 주민 지원 조례’가 제정되어 시 차원의 예산 편성을 도모했다는 점인데, 이는 홍인화 의원 등 광주광역시의회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전국에서 최초라 손꼽힌다. 조례를 기반으로 2014년 비영리법인인 ‘고려인마을’을 등록하고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설립을 추진했다. 이는 곳곳에 흩어진 시설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제안되었고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2015년까지 십시일반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결국 2015년 9월 7일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개소, 이듬 해 전국 최초 ‘고려FM 라디오 방송’을 개국해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국과 여러 소식들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독립투쟁을 시작으로 한인들과 함께 강제 이후된 후 고려극장(당시 조선극장)에서 청소부 일을 하다 생을 마감한 홍범도를 기리는 공원도 조성했다.
(위: 고려FM 개국 행사, 아래: 월곡 고려인문화관 개관식(2021). 출처: 고려인마을 웹사이트)
이러한 움직임들은 학술적 흐름과 동반되어, 2018년은 ‘고려인인문사회연구소’를 열어 고려인과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2019년에는 고려인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고려인 역사를 담은 각종 기록물들을 담을 공간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워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 ‘숨결’과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이 2021년 5월에 개관했다. 카자흐스탄 <고려일보>를 재직했고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소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병학 관장은 재소 고려인 작가 한진의 육필원고를 비롯한 유물 1만 2천 점을 이곳에서 보존하고 있다. 개중에 23권은 2020년 국가지정기록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공간 역시 장소가 협소해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청과 협력해 ‘월곡동 복합 아카이브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한겨례 신문에 따르면, 광주 고려인마을에는 현재 우크라이나, 러시아 출신 고려인 5700 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대대적인 모금운동에 나서 4월 13일 기준 11차례에 걸쳐 79명의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지원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려인들의 귀국을 도울 계획이다. 광산구청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 광주 YMCA 등 시민단체, 종교단체 뿐 아니라 많은 개인의 후원이 모여 12일 기준 3천만원이 육박하는 기금이 모였다. 이민자라는 정체성은 얼추 백년을 채워가고 있지만, 그들의 민족적 조국인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중 정체성 문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다는 점이 그 증거다.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전방위적으로 필요하다.
참고
한겨례기사, ’우크라 탈출’ 고려인 동포들, 광주서 ‘종전과 평화’ 외친다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37212.html
한겨례기사, ’낯선 광주’에서 전쟁 시름 덜어가는 우크라 탈출 고려인들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39055.html
참고 문헌
고려인마을 사람들, 2019,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국내동포의 제반문제와 정부기관의 역할', 2021, 재외동포재단 조사연구용역보고서
코멘트를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