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리 05. 조력자살의 일론 머스크, ‘닥터 데스(Dr. Death)’
현안과이슈 / by 우엉군 / 작성일 : 2022.06.21 / 수정일 : 2022.06.21
“평온한 자살을 돕는 것은 범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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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집행한 의사
안락사 관련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 사이트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곳은 1997년에 호주에서 설립된 안락사 애드보커시 민간단체 ‘엑시트 인터내셔널(Exit International)’입니다. 천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필립 니치키(Philip Nitschke) 박사가 설립했습니다. 니치키 박사는 지난 호주 사례에서 살폈듯이 세계 최초로 4명의 안락사를 집행한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필립 니치키 박사는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항상 안락사와 관련해 도발적인 화두를 던집니다. 첫 질문은 “평온한 죽음은 불가능한가?”였습니다. 그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1995년 호주의 노던 준주에서 안락사 관련 입법을 이끌어 냅니다. 1997년에 연방의회가 이를 금지하자 엑시트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자살을 돕는 것은 범죄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의 별명은 ‘닥터 데스(Dr. Death)’입니다. 죽음을 집도하는 의사라는 뜻이죠. 니치키 박사는 2006년에 ‘평온에 이르는 약 핸드북(The Peaceful Pill Handbook)’을 출간해 당시 안락사 방법론을 집대성했습니다. 이후 뉴스위크가 ‘조력자살의 일론 머스크’라는 별명을 추가합니다. 기술적 측면에서 혁신적 솔루션을 추구하던 니치키 박사가 2017년에 ‘사르코(Sarco)’라는 안락사 머신을 출시했기 때문이죠. 프랑스 혁명에 탄생한 단두대(기요틴)에 버금가는 죽음의 혁신이었습니다.
의사 자격증을 불태우다
니치키 박사는 레이저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과학계 커리어를 걷지 않고 노던 준주에서 호주 원주민(애보리진)의 토지 권리를 회복시키는 활동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부로부터 일부 영토를 돌려받은 니치키 박사는 노던 준주 국립공원 수비대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부상으로 업무가 어려워지자 뒤늦게 의대에 진학해 1989년에 43살의 나이로 의사 자격을 취득합니다.
의사로서 커리어의 출발지역 역시 노던 준주였습니다. 하지만 1995년 노던 준주 의회가 세계 최초로 ‘말기 환자의 권리에 관한 법률(Rights of the Terminally Ill Act 1995)’을 입법하면서 운명이 뒤바뀝니다. 호주의사협회 노던 준주지부에서 이 안락사 법안을 반대하자, 니치키 박사와 뜻을 함께하는 의사들이 ‘변화를 위한 의사(Doctors for Change)’ 단체를 만들어 맞대응에 들어간 겁입니다. 니치키 박사는 안락사 옹호 관련 비공식 대변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활동가 커리어가 의사 커리어와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997년에 연방의회가 준주의회의 안락사 입법을 금지하면서 이후 니치키 박사는 몇 차례 연방 선거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충돌한 니치키 박사와 의사협회와의 갈등은 2014년에 최고조에 이릅니다. 니치키 박사는 브레일리 자살 사건에 연루되자 호주의사위원회는 그의 의사 자격을 긴급 정지합니다. 2015년까지 법원에서 소송이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니치키 박사가 승소하나, 위원회는 자격 회복을 위해 25개의 조건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니치키 박사가 대중과 환자에게 안락사, 넴부탈, 자살에 대한 일체의 정보나 조언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니치키 박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천여 명의 엑시트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회원들은 그의 의사 자격 종료를 지지했습니다. 이에 니치키 박사는 의료 행위를 중단하고 안락사 옹호 활동가로 전환한다고 공식 선언합니다. 2015년에 그는 호주를 떠나 안락사 운동에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거처를 옮겼고, 현재는 암스테르담 외곽의 하우스보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2015년 소송 금액이 30만 호주달러(약 2억7천억원)였는데 그 중 2만 호주달러를 스위스의 안락사 단체인 디그니타스가 지원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2015년 소송은 니치키 박사가 국제적 연대를 다지는 기폭제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의사 자격증을 불태우는 니치키 박사
의약품이 아닌 다른 해법은 없는가?
니치키 박사는 법적 논리적 접근 외에도 기술적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오랜 시간 조력자살은 ‘넴부탈(펜토바르비탈)’에 의존해왔습니다. 넴부탈은 일정량 사용하면 진정제와 수면제로 기능하나, 과다 투입하면 잠자듯 호흡을 정지시켜 반려동물의 안락사나 사형 집행에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에 네덜란드 등은 의사 조력자살의 표준으로 주사나 알약 형태의 넴부탈을 활용해왔습니다.
하지만 2014년 브레일리 자살 사건에 연루되면서 니치키 박사와 엑시트 인터내셔널은 의사 단체와의 갈등은 물론,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됩니다. 넴부탈 구매는 번번히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올랐고, 해외에서 안락사를 진행하는 경우에는 수입을 문제 삼아 인터폴이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자살을 돕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는 경찰이 한 밤중에 엑시트 회원의 집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는데, 그 충격으로 인해 자살로 이어진 비극도 있었습니다.
이에 니치키 박사는 넴부탈을 대체할 대안을 찾아 나섰고 결국 ‘질소’에 이르게 됩니다. 박사는 2008년에 바비큐 가스통과 질소를 접목시켰고, 2012년에는 맥주 양조 가스실린더와 질소통을 접목해 안락사 머신을 개발했습니다. 일련의 실험 끝에 그는 2017년에 자살 캡슐(또는 자살 기계)로 불리우는 ‘사르코(Sarco)’를 개발합니다. 희망자가 사르코 속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대량 발생하고 산소 수치를 떨어뜨리면서 의식을 잃고 호흡이 정지되는 원리입니다. 진행 시간은 10분 내외입니다.
니치키 박사의 커뮤니케이션 실험도 주목할 만합니다. 2015년에 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코미디 공연을 한 편 올렸습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안락사 운동으로 뒤바뀐 자신의 운명에 ‘유머’ 한 스푼을 추가한 것입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좋게 평가해주었습니다. 책, 영화, 방송, 광고, 캠페인, 여행 등 이미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그는 다양한 눈높이에서, 그리고 더 쉽고 보편적인 언어로 죽음이라는 금기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니치키 박사는 평온한 죽음을 넘어 아름다운 죽음까지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살 캡슐 '사르코(Sarco)'
참고 자료
Philip Nitschke, Wikiphedia
Philip Nitschke, Exit International
펜토바르비탈, 위키백과
스위스에서 '자살 캡슐' 첫 출시될 듯, 2021.12.11, BBC 코리아
'쾌락있는 죽음' 위해 호주 의사가 만든 '존엄사 기계', 2018.4.11, 한겨레
*사용된 이미지는 Exit International 웹사이트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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