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리 8. 디그니타스, 영국의 '죽음 아웃소싱' 비난
현안과이슈 / by 우엉군 / 작성일 : 2022.10.04 / 수정일 : 2022.10.05

 “그들이 왜 값비싼 자살 관광을 떠나야 하는가?”

바다 저 편의 뉴스들이 죽음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시간 순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좋은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위치하지 않을까요? 안락사, 존엄사, 호스피스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디그니타스, 스코틀랜드 조력사 입법 지원

지난 9월 25일, 영국언론 BBC가 스코틀랜드 국회가 조력사 입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전했습니다. 리암 맥아더 의원이 발의한 법안(Assisted Dying for Terminally Ill Adults)은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성인 말기환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입법안은 지난 1년간 의견을 수렴하고, 정족수를 넘은 의원 32명의 서명을 얻어 무난하게 발의될 예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뉴스의 상당 분량이 스코틀랜드가 아닌 디그니타스의 코멘트를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스위스 안락사기관인 디그니타스(Dignitas)는 스코틀랜드의 입법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국 국회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16명의 스코틀랜드인을 포함해서, 500명에 가까운 영국인들이 자신의 집을 떠나도록 내몰리고 있다. 이들은 단지 합법적인 조력사(assisted dying)를 위해 디그니타스를 찾고 있다. 영국은 수년간 조력사 문제를 스위스에 아웃소싱해 왔다. 이는 영국 시민들이 집에서 임종을 맞이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영국은 조력사를 스위스에 아웃소싱하고 있다”

안락사의 대표 국가는 어디일까요? 2000년대 중반 언론에 디그니타스가 소개되고 ‘미비포유’ 등 영화에서 안락사 장소로 묘사되면서 스위스를 찾는 말기 환자가 늘었고, 스위스는 ‘자살 관광국’이라는 악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스위스가 그런 악명을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애적 관점에서 외국인의 조력자살까지 포용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웨일즈, 북아일랜드에서 자살은 범죄입니다. 또한 타인의 자살을 돕는 사람은 최대 14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자살조력을 범죄로 규정하진 않지만 과실치사로 기소가 가능합니다. 반면 스위스는 동기에 따라 범죄가 구성됩니다. 타인의 자살을 ‘이기적인 동기’로 도우면 범죄이나, ‘이타적인 동기’로 도우면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디그니타스를 비롯해 수많은 조력사 비영리기관들이 스위스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년 디그니타스는 ‘진짜 비용: 영국은 어떻게 죽음을 디그니타스에 아웃소싱하고 있는가(THE TRUE COST: How the UK outsources death to Dignitas)’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2015년에 이코노미스트가 영국을 죽음의질 지수 세계 1위로 선정한 것에 대한 정면 반박이었죠. 디그니타스의 보고서는 최근 5년간(2012-2016) 영국인 회원 가입이 821명에서 1139명으로 39% 증가했고, 2016년에만 47명의 영국인이 디그니타스에서 조력자살을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8일 마다 영국인 한 명이 디그니타스를 찾는 셈입니다. 보고서가 지적하는 대표적인 비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 경제적 비용입니다. 영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디그니타스에서 임종하는데 평균 1만 파운드(2017년 환율 기준 약 1,455만원)가 필요합니다. 이동거리와 동행인에 따라 비용은 최저 7천 파운드에서 최대 1.5만 파운드로 벌어지죠. 비용에는 왕복 항공비, 숙식비, 서비스 이용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017년 기준으로 영국 가구 68%의 저축액이 1만 파운드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해외 조력자살은 중산층이나 시도할 수 있는 사치입니다.

둘, 절차적 비용입니다. 스위스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독일어를 중심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어를 사용하고 있죠.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인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해야 합니다. 디그니타스는 의료 기록을 비롯해 다양한 준비 서류들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환자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 정보 수집, 서류 준비, 이동, 현지 생활 등 곳곳에서 언어적-문화적 장벽을 마주해야 합니다. 

셋, 안전 비용입니다. 디그니타스는 가족이나 친구의 동행을 요구합니다. 환자는 짧은 이동에도 많은 체력이 소모됩니다. 하물며 비행기를 타야 하는 말기 환자는 이동 중에 어떤 사고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조력자살을 철회하는 경우도 잦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동행인은 조력자살을 지켜보고 시신을 수습해 돌아갑니다. 스위스에서 화장할 경우, 영국에서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밟을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그대로 옮기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동행인은 정서적 지원을 받기는 커녕 입국시 범법행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동행인은 피의자로서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위스, 상담 기간을 2주로 강화

1998년에 인권 변호사 루드비히 미넬리(Ludwig Minelli)가 설립한 디그니타스는 자살을 “인간의 마지막 자유”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조력자살만을 신봉하지 않습니다. 단체는 완화의료, 자살 예방교육, 존엄한 죽음 교육 등을 진행하며 죽음에 대한 선택지를 계속 넓혀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조력자살을 금지하고 있는 오래된 법과 싸우고 있죠. 그 성과로 2019년 오스트리아, 2020년 독일에서 각각 조력자살 금지에 대한 위헌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한편, 스위스 의료계는 조력자살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올해 5월, 스위스의학아카데미(SAMS)는 ‘임종과 죽음에 대한 관리(Management of Dying and Death)’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내놨고, 스위스의사협회(FMH)는 이를 의무 조항으로 채택했습니다. 개정안의 핵심은 “의사는 2주간 간격을 두고 최소 두 차례 이상 조력자살 희망 환자를 상담해야 한다”입니다. 이로써 세 가지가 변화됩니다. 조력자살 판단의 주체가 ‘의사’가 되고, 심각한 고통은 ‘의학적 진단’이 가능해야 하며, 희망 환자는 최소 ‘2주간’ 스위스에 체류해야 합니다. 해외 조력자살을 희망하는 사람은 비용은 물론 불확실성도 함께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덧) 2021년말 기준, 디그니타스 회원을 국적별로 살펴보면 독일(4168), 영국(1433), 프랑스(1147), 스위스(857), 미국(839) 순으로 많습니다. 한국은 작년에만 32명이 가입해 104명으로 12위로 껑충 올라섰습니다. 1998년부터 2021년까지 실제로 조력자살을 진행한 회원 또한 독일(1440), 영국(498), 프랑스(453), 스위스(215), 미국(145) 순입니다. 조력자살 아웃소싱은 독일과 프랑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력자살이 진행되는 디그니타스의 블루하우스



참고 문헌



** 사용된 이미지는 디그니타스 보고서의 웹페이지에서 활용했습니다.












작성자 : 우엉군 / 작성일 : 2022.10.04 / 수정일 : 2022.10.05 / 조회수 : 17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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