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부터 정확히 58년 전이 무슨 날인 줄 아시나요? 바로 미국 선거권법 서명일입니다. 미국 선거권법은 흑인 민권 운동과 더불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핵심 이데올로기 중 하나입니다.인권 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가 굵직하게 채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미국이 여러모로 최고(最古) 민주주의 국가라는 세간의 평가를, 선거권 보장 역사를 두고 고려해 본다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몇 글자로 짧게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정말 많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투쟁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 회고해봅니다. 또 그 무엇보다 타인을 함께 세우는 일, 공익을 위해 움직이는 우리가 먼저 이러한 역사적 이슈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흑인 노예의 해방과 차별의 합법화(?): 짐 크로 법(Jim Crow Laws)
미국 남북 전쟁은 노예제 폐지를 기치로 내건 북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흑인 차별은 더 교묘하고 집요하게 지속되었습니다.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된 짐 크로법이 대표적입니다.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자 남부측 주정부들은 흑인들을 '노예제 이외'의 수단으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흑인들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던 기득권 백인 11개 주 연합은 이 법안으로 모든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흑인을 분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공식화된 인종 분리로 흑인들은 모든 기간시설과 서비스 이용에서 백인들과 마주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죠.
"Seperate but Equal,"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해당 문구를 발표하며 인종분리정책에 대해 합헌 판결을 했지만, 실상은 전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해 더 궁금하시다면 서울경제 권홍우 논설위원의 글(참고문헌 링크)을 참조해 주세요.
흑인들은 민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권, 선거권, 집회권, 시민권 등을 빼앗겼습니다. 1890년 흑인 혐오가 극에 달하던 미시시피주는 문맹검사제(Literacy Test)를 도입하였고, 이 제도는 이후 남부 다른 주에까지 점차 퍼집니다. 명목상으론 문맹자 관리와 선거명부 등록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흑인들에게는 헌법을 읽고 해석하거나, 라틴어를 번역하는 등의, 일상생활과 무관한 말도 안되는 문제를 내어 최대한 떨어트렸습니다. 법 도입 10년 만에 흑인 투표율 0%를 달성했으니, 그 위력은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2. 변화의 분기점: 양차 대전, 재키 로빈슨
20세기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노예제를 태어나기 전부터 경험해 차별에 순응하였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르게 젊은 흑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플래시 더 퍼거슨 사건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도 20세기 초 1909년에 창립하였죠.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흑인 차별이 무너질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곳은 군대입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태평양전쟁 당시 국가의 기간시설을 모두 전쟁에 1순위로 맞춰 운영하는 총력전에 돌입하면서, 백인 남성만으로는 생산과 파병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간극을 채워준 것이 바로 흑인입니다. 흑인 남성 100만 명 이상이 '미국'의 대표로 파병, 연합군 승리에 큰 역할을 하면서 제도권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가장 큰 인권-역사적 유산은 1948년 공포된 대통령령 9881호입니다. 군 내에서 인종 분리를 금지한 해당 령은 군 내 인종통합, 더 나아가 사회 내 흑인 지위 변화를 가져옵니다 (박진빈, 15). 전시라는 비극이 흑인을 사회로 불러낸 셈이죠.
스포츠 분야에서도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바로 재키 로빈슨으로 대표되는 흑인 운동선수들의 전국구 프로리그 등장(1947년)입니다. 40년대 초까지만 해도 흑인 선수들은 프로리그에 소속될 수 없었고, 별도의 니그로리그에서만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으로 많은 선수가 징집되면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당시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야구 역시 인력 수급에 난항을 겪게 됩니다. 이때 브루클린 다저스는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메이저리그로 불러들였고, 그는 보란 듯이 숱한 차별들을 이겨낸 대활약으로 소속팀의 우승에 공헌하며 흑인 인식 전환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의 등장 이후 다른 팀들도 재능 있는 흑인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고, NFL(National Football League, 미식축구)과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농구)도 이즈음부터 흑인 선수들을 필드 위로 내보냅니다.
상기한 시대적 흐름은 사회 일반에 흑백차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변화 계기로 작동하게 됩니다.
3. 역사적 승리: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 로자 파크스와 버스 승차 거부 운동
1954년 5월 17일, 미국 인권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판결이 내려집니다. 연방대법원이 기존 수십 년간의 판례를 뒤집고 흑백분리가 불공정하다 판결 내리면서, 수많은 분리 정책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캔자스주 토피카에 거주하던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 바로 앞의 학교를 백인 전용 공립학교란 이유로 전학을 거부당한 채 1마일 떨어진 기존의 흑인 전용 학교에 계속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의문을 품은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딸이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주위 흑인 부모들과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도움을 받아 연방대법원에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고소합니다.
3년간의 긴 싸움 끝에 마침내 브라운가 측이 만장일치 승리를 거두면서, 기존의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의 공립교육 내 흑백 분리의 "seperate but equal" 판결은 폐기되었고 "inherently unequal,"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가 명문화됩니다. 물론, 남부주들은 50년대 후반까지 철저한 흑백 분리교육을 유지하며 판결에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사립학교는 애초에 시정조치 대상도 아니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판결은 흑인민권운동의 법적 근반이자 이후 잇따른 승리에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합니다. 또, 당시 청구인 측 변호사 서굿 마셜은 대활약을 인정받아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까지 임명되며 승승장구, 흑인민권운동의 또 다른 상징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955년,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전용버스로의 이동 지시를 거부해 체포당하는, 일명 로자 파크스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기존 제도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더해 흑인 사회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몽고메리 흑인들의 대규모 버스 탑승 보이콧으로 이어집니다. 이 보이콧에서 여론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게 오늘날 흑인민권운동의 아버지로 꼽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주정부는 자동차 면허를 말소하는 등의 불이익, 공권력의 사적 전용으로 이들을 강경 탄압했습니다. 주도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자 파크스를 체포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흑인들은 멈추지 않았고, 승차 거부 운동은 전국구 TV 뉴스를 통해 송출되기에 이릅니다. 소식을 접한 NACCP와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를 연방대법원에 위헌 심판 청구하였고, 결과는 위헌 결정, 승리였습니다. 이후 흑인민권운동은 그 도화선에 불이 붙게 됩니다.
4. 마침내 서명된 투표권법, 미국의 약속
끊임없는 저항과 인식개선 활동의 결과로 마침내, 1965년 8월 6일, 린드 존슨 대통령이 선거권법에 서명합니다. 이는 투표에 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한 법률로 선거 자격 제한, 투표에 필요한 절차, 관행을 요구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을 주 골자로 합니다 (National Archives and Record Administration). 기존 주정부의 관행을 인정해 주었던 연방 행정부의 입장도 강경하게 변하는데, 선거법이나 정책을 변경할 때 무조건 연방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됩니다. 1964년 연방 민권법 성립에 더해, 짐 크로 법을 포함한 사실상 모든 형태의 법적 차별이 폐지 수순을 밟습니다. 1619년, 흑인이 미국에 처음 발 들인 이후 무려 346년 만에 미국 내 흑인들이 진정한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죠 (Voice of America, 2010).
마치며...
'합법적'인 차별은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종차별과 이에 대한 저항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핵심 사회문제 중 하나입니다. 미국 정치의 우경화와 포퓰리즘, Black Lives Matter 등 최근의 사태만 보아도 알 수 있죠. 여론을 떠나서, 비교적 오랫동안 단일 민족 형태를 유지한 이역만리 타국서 낳고 자란 저로서는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요즈음 한국도 인종차별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참 가슴이 아픕니다. 미국의 분리정책도 국민 다수로부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주 노동자, 난민, 다문화가정 이슈까지... 우리가 누구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는지?
인종을 떠나서라도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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