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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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먹히는 대전제는 하나. 한국만이 원래 잘 살던 나라가 아니면서 민주화와 경제적 산업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이기에. 우리나라가 원래 못 사는 나라면 헬조선, 분배 이런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화 자체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분배이야기 자체가 나올 수 없다. 한국처럼 교육수준이 원래 높고(대학졸업생이 전 세계에서 1,2위 다툼), 몇몇 유럽국가보다도 더 잘사는 곳이 세상에서 없다. 못 살지 않은데 민주화는 되어 있기에 분배문제가 나오는 것. 마르크스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층의 사상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힘든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데, 안 힘들거나 덜 힘든 사람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게 먹힌다는 것. 힘든 당사자도 내면화되어서, 자기가 문제가 있어서 자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고, 개인의 도덕적, 심리적, 파편화된 도덕주의적으로 바뀌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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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학생들이 졸업하고 취직 못한다고 할 때, 원래 일정 수는 취업을 못 한다. 그런데 블로그 같은 곳에 서로이웃이 올리는 글을 보면, 스스로가 대학 4년 간 자만심에 뭉쳐서 거만하게 굴었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쓴다. 철학 책 덜 볼 걸 하고 후회한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수많은 곳에 취업원서를 넣고 떨어져보니 자신감이 제로가 된다고 쓴다. 제 생각에는, 그 친구가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를 하는 지, 자기를 펼치게 해주어야 자신만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나갈 것임.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답을 주려고 한다는 것. 위로를 하려는 것. 물론 위로를 해야 되겠지만, 절망하는 사람들은 절망할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무조건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원래 대학생 30-40%는 취직 못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어른들은 눈이 높아서 그렇다고 얘기하겠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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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각자는 다른 사람이다. 19세기 맑스가 우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20세기 프랑스인 푸코가 우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16세기 중국의 육상산이 말한다. 사서삼경이 내 삶의 원본이고 내가 그 책에 나오는 군자가 되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참고서로 보는 것이라고. 내가 아버지의 삶을 존중할 수 있지만 내 모델은 아닌 것. 진짜 프랑스 철학을 했다면, 프랑스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일탈과 저항을 해야 하는 데 저항을 하지 않음. 그렇게 해서는 답이 안 나오는 것. 정답을 말한 마지막 철학자인 맑스 이후에 니체나 들뢰즈 푸코 책에는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지만, 내 생각에는 그걸 책에서 찾으면 안 되는 것. 그런데 세상에 정답은 없고 자기정답만 있을 뿐이다. 정답들은 모두 다르기에, 정답들의 투쟁인 것이다. 무수한 사상을 만나도 여러분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저도 여러분과 대등한 인간이고 시민으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두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대등하게 선생님으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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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라는 것이 정확히 존재하는가? 어떤 청년을 말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청년들이 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공통분모는 딱 하나 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지만, 담론을 조작당하는 대상이라는 것. 저는 직업상으로 요즘 20대 초반 학생들이 무슨 생각하는 지를 듣게 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악화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강도가 더 세졌다. 지금은 취직이 안 되면,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순간 세상은 정말 거친 곳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독립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안될 경우 ‘내’가 문제가 있고, ‘내’가 영어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신이 스스로 힘으로 돈 벌어서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여기에 딱 걸리면, 객관화가 안 된다. 내가 돈이 조금 있어서 한 2-3년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은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조금 우울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한 달 살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게 어렵다. 마치 축구에서 계속해서 골을 먹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자체가 안 나는 것처럼. 청년들이 스스로 벌어 놓은 돈이 없는 경우, 그걸 매달 갚으려고 할 때, 최소한의 자존심 유지비를 갖지 못할 경우, 내가 인생을 잘 못 살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통장잔고 때문에 내가 잘못 살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말하는 어떤 기준 이하가 되면, 내 인생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낀다. 그러면서 도덕주의, 개체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리학화’된다는 것. 누군가의 행동동기에 대해서 심리분석을 한다는 건, 그 인간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심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감시와 처벌의 시스템이고, 죄책감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이 1975년에 나왔다. 1887년에 니체가 <<도덕의 계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니체는, ‘근대인간을 컨트롤하는 최고의 장치는 죄책감’이라고 말한다. 개인을 도덕화, 심리학화,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고, 그런 시스템에 빠지면 자기객관화가 안 된다. 완벽한 인간은 없기에, 실제 인간은 누구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자기가 이 사회에서 사람구실 - 경제적 독립 -이 안될 때, 이것을 벗어나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중에 그 시기를 지나면 그런 생각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대학 막 졸업한 친구들에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얘기해줘도 실감이 잘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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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자신을 성장시켰지만, 지금은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을 떨치고 어떻게 그 알을 깨고 나갈 수 있을까? 제가 볼 때는, 안 하면 죽을 때이다.
생태문제의 경우, 소비자들이 아주 망하면 기득권들도 망하기 때문에, 아주 망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현명한 것인지 교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기득권층이 과연 죽게 되어도 바뀔까? 실제 역사를 보면, 죽게 되었는데도 안 바뀌고 그냥 죽는다. 권력을 나누는 권력자보다, 안 내놓고 있다가 끌려가서 죽는 권력자가 더 많다. 개인도 비슷하다. 영어 공부를 잘 하고 싶을 때, 안 해도 될 때 잘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놀라운 동물이어서, 자기가 안 해도 되는 이유(내가 미국 가서 살 것도 아니다. 내가 사장해서 영어 잘하는 사람 고용하면 된다.)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이유(수업에 조금 나가다가 몇 번 빠지게 되면, 메일을 보내서 앞으로 못 나오겠다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책을 읽지 않고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수업에 방해된다고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객관성이 결여된 이야기인 것이다.)까지 찾는다. 이 경우 ‘객관성’은 상실된다.
한국사회에는, 기득권자들의 담론이 당연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교육 혹은 세뇌를 받아서,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접하기 어렵기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담론 속에서 살게 된다. 그 때 내가 당연하게 느끼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남들이 정해준 틀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 ‘남’은 ‘지금 내게 떠오르는 생각’이다. 진짜 나는 생각이 든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 ‘지금의 나’가 진짜 나인 것이다. 도덕화, 심리학화, 파편화, 개체화에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니체와 푸코가 말하는 감시와 처벌은, ‘모두가 모두를’, 특히 ‘내가 나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게 드는 죄책감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내게 드는 죄책감은 내게 ‘학습된’것이기에.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 대해서 나름대로 학습된 생각의 틀 안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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