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NPO지원센터 <품다>를 비롯한 1층 공간은 사람과 삶을 고민하는 작품들로 채워지는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사회문제에 공감하여 공익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공익의 영역이 예술의 기법을 받아들여 은유적으로 문제를 나눔으로써 예술과 공익활동의 능력을 키워내는 새로운 형태의 협업공간입니다.
* <작가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는 전시를 이어가는 작가들이 릴레이 형태로 다음 전시 작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작업? 생활? 예술?
부단히 작업하는 것의 고단함
김순주 : 동양화로 시작해서 판화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언니네 마당’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고 일러스트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번 전시 ‘들여다 봄’에는 ‘언니네 마당’에 작품을 실었던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함께 참여했다. 이번 이일순 작가 전시를 보니 작품을 우리 잡지에도 꼭 싣고 싶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다.
이일순 : 대학교, 대학원 시절에는 표현주의 작가를 좋아해서인지 작품이 거칠었다. 대학원 막바지에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나와서 처음 작업실을 구했다. 학원에서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빈 시간에는 그 공간에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사방이 창문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수족관 같은 공간에 애들이 없는 시간에도 떠드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부모님은 타지에 계시고 치매가 있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리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때 우울감이 왔고 첫 개인전을 할 때 그림이 확 바뀌었다.
이일순 : 두 번 째 개인전은 5년이 지난 후였다. 첫 개인전 하고 다음해에 결혼했는데 작품 한다는 걸 시댁에 알리지 못했다. 남편도 그림 하는 사람이었는데 시댁에서는 아들이 안정적이고 번듯한 일을 하기를 원했고 작품 하는 걸 계속 반대했다. 그래서 며느리까지 드러내놓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 째 개인전을 5년 만에 했다. 작품이 확 변하지는 않고 그 기조를 계속 가지고 가면서 그때부터 위안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다독일 수 있는 게 작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풀어내서 무언가를 구축해냈을 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이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김순주 : 저도 결혼 이후 공백이 길었고 우울이 왔다. 우리는 어쨌든 이걸 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를 완성해 나가는 것에서 존재감을 느낀다. 남들한테 대단해 보이기 위해서가, 유명해지거나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작품이나 활동을 안하고 살았을 때랑 다시 했을 때랑 삶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일순 : 결혼한 여자 작가들에게 있어 작업을 계속한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특히 회화의 경우 경제적인 활동과 연결이 잘 안된다. 그러다 보니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이나 가족들마저 소비하는 행위로만 생각한다. 작품이 쌓이면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다. 작업실 비용도 계속 부담해야 하니까. 이 작업이 경제활동이 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다.
김순주: 결혼 이후 활동을 쉰 경단녀들의 경우 연대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것 같다. 다들 고통이 있고 공백기가 있고 비슷하다. 나와서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힐링이다.
이일순 : 저도 소속되어 있는 여자 작가 그룹이 있다. 결혼이나 아이를 키운다거나 하는 상황을 먼저 겪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 물을 건널 수 있을 때까지 징검다리가 되어 주자, 혼자 가기 힘든 사람들을 두고 가지 말자는 생각으로 그룹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내가 빠져든 우울같은 걸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누가 자꾸만 끌어내줘야 한다.
김순주 : 여자들은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우울한 시기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예전에는 개인전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룹전도 좋은 것 같다. 서로 모여서 돈독해지고 정보도 나누고. 지금도 친구들에게 나오라고, 그리라고 계속 권한다. 전시를 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언니네마당’에 그림을 한번 싣고 거기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면 거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일순 : 누군가를 신경쓰고 부추기고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는 건 소중한 가치이다.
김순주 : 잡지 만들면서 원고 쓰라는 구박을 받아서 버티다가 결국 쓰게 됐는데 깨달은 게 있다. 못한다고 생각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못하지만 한번 해보면 그 다음에도 시도할 수 있다.
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김순주 : 이일순 작가 그림은 일러스트 같기고 하고 몽환적이고 힐링의 느낌도 있다. 사람이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그림도 첫인상이 중요하다. 스토리는 두번째이다. 첫인상이 매력적이어야 확 와닿는다. 작품을 하다 보면 복잡해지는 시기가 있지만 쉬운 그림이 좋은 것 같다. 이일순 작가 작품은 첫인상이 편하고 좋다. 아트상품이라던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일순 : 요즘 그런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작업과 연관되면서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아트상품 분야가 있을까 싶어서 서울 오면 큰 매장에 가서 문구라도 하나씩 사간다. 내가 상품을 만들었을 때 어디 가져가서 팔 것인지 과연 선호할 것인지 생각하면 재미있다. 출판사에서 이철수 판화가 작품집처럼 그림과 글로 책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글 쓸 자신이 없어서 답을 못했다. 몇 번 제안이 있었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성사되지 못했다.
김순주 : 내가 아줌마로서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계약을 하러가면 하라는 대로 네네 하지 않고 이런저런 제안을 한다. 그러면 그쪽에서 미처 생각을 못했다면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고. 설레발을 치면서 아는 작가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아줌마로서의 우울증 가득한 세월이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제가 볼 때는 이일순 작가 작품은 상업성이 있다. 손바닥 만한 책, 힐링되는 동화, 입체북 팝업북으로도 좋을 것 같다.
이일순 : 작품 완성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내 작업 스타일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서 수익을 위한 다른 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하고 싶은 걸 실행에 옮길 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비용도 많이 발생하고 지체되지 않나 싶다.
김순주 ; 방법은 찾기 나름인 것 같다. 우선 SNS을 많이 하면서 팔로잉도 많이 해두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관련된 곳도 많이 찾아다니고 많이 시도해 보면 계기가 생긴다. 우리 잡지는 많이 팔리는 잡지는 아니지만 사람이 많이 발굴된다. 아무것도 아닌 잡지이지만 지면에 실리면 나도 할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계기가 중요하다.
이일순 : 오늘 처음 만나고 사는 곳도 작업 스타일도 다르지만 결혼한 여자 작가로 느끼는 우울과 좌절감, 그럼에도 계속해서 작업하는 이유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 하나의 연대의 끈이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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