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 ①
* 서울시NPO지원센터 <품다>를 비롯한 1층 공간은 사람과 삶을 고민하는 작품들로 채워지는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사회문제에 공감하여 공익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공익의 영역이 예술의 기법을 받아들여 은유적으로 문제를 나눔으로써 예술과 공익활동의 능력을 키워내는 새로운 형태의 협업공간입니다.
* <작가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는 전시를 이어가는 작가들이 릴레이 형태로 다음 전시작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서울시NPO지원센터 1층 품다 전시 인터뷰, 홍예슬 작가 ‘한글로 그림’
서울시NPO지원센터 1층 ‘품다’에서 ‘한글로 그림’을 전시 중인 작가 홍예슬. 작가의 작품 속에선 ‘ㅇ’이 달이 되기도 하고 ‘ㅠ’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어떤 연유로 한글을 그림으로 그리게 된 걸까. 9월의 끝자락, 그녀의 얘기를 들으러 같은 공간에서 ‘아늑한 구석’을 주제로 전시했던 배미정 작가가 찾아왔다.
홍예슬 작가님은 내공이 대단하신 분. 생각을 간단한 기술로 표현하는 건 정말 힘든 일.
- 배미정 작가
배미정 작가는 홍예슬 작가를 작품으로 먼저 만났다. 어떤 사람인지 정보가 없었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한다.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느낌을 전하며 인터뷰가 시작됐다. 배미정 작가는 그림을 보며 궁금했던 것을 먼저 물었다.
* 배 : 배미정 작가 *홍: 홍예슬 작가
배: 처음엔 화자의 성별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뒤에 여자가 나오니깐 화자가 남자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의도한 게 있나요?
홍: “얼굴을 안 보이게 한 건 남자 여자 신경을 안 쓰고 싶었어요. 동성 간 만남이든 이성간 만남이든 친구와의 만남이든 해석에 맡기고 싶었어요. 어떤 만남이라고 정해 놓고 싶지 않았어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그리고 싶었어요. 같은 사람으로 하기엔 내가 나를 만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여자로 구별해 그렸지만요.”
글자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내용이 돼 한편의 시가 되는 이 작품들이 참 좋다고 말하는 배미정 작가는 전시돼 있는 작품들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배미정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렇지만 삽화가 무시되는 분위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글자와 그림이 떨어져 있지 않은 홍예슬 작가의 작품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한다.
그림 안에 내가 살아온 인생도 있지만 이걸 보는 사람은 각자의 삶을 통해서 본다며 그게 제일 재미있다고 홍예슬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한 일화를 들려줬다. 어떤 분이 너무 진지하게 그림을 보기에 감사해서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분이 울먹이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냐고 되물었다고.
그때 작가는 생각했다고 한다. 각자의 삶을 통해서 그림을 보니 이 그림이 깊어지는구나. 나는 그 정도의 깊은 삶을 살지 못했더라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홍예슬 작가는 이어 아이가 그린 것처럼 천진난만한 그림으로 유명한 장욱진 작가의 얘기를 들려줬다.
홍: “장욱진 작가의 초기작품은 어두운 톤의 그림이 많았어요. 점점 선도 간결해지고 색과 분위기가 밝아지더라고요. 그림의 변화를 보면서 그 작가의 삶도 보이는 것 같아 좋았어요. 나도 나의 그림도 조금씩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화하겠구나. 지금 있는 척하지 않아도 충분히 지금 나의 작업을 하면 되겠구나.”
전시라는 게 자기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보는 거라며 창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홍예슬 작가의 말에 배미정 작가는 전시하면 나를 걸어 놓는 것 같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홍예슬 작가에게도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림을 긴 시간 쉬었다는 홍예슬 작가의 말에 배미정 작가는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다.
6년간의 공백, 더 이상 이 판에서 그림 그리고 싶지 않아……
홍: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평생 그림을 그릴 거라 생각하며 살았어요. 대학교도 자연스레 동양화과로 갔고요. 그런데 어렸을 때엔 알지 못했던 미술계의 현실을 마주하고 붓을 놓았었어요. 졸업전시를 끝내고 붓을 놓고 학교를 나왔어요.”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에 실망해 10여 년간 해오던 일을 그만두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까. 미술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작가의 말엔 진로방향을 정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 지 짐작하게 한다. 긴 슬럼프가 찾아올 만도 한데 다행히도 홍예슬 작가는 우연히 맺게 된 인연으로 자신이 관심 있던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바로 연극이었다.
홍: “교양수업에서 듣는 것 중 재미있어 보이는 게 연극 쪽이었어요. 처음 연극을 봤을 때 신세계였어요. 100석 정도 되는 규모 앞에서 배우들이 움직이고 하는 게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연극 감상 레포트를 써야 될 일이 있어서 자료 공유 카페에 가입해 다운 받고 그랬거든요. 우연히 거기에서 채팅을 하게 된 사람이 제가 본 연극 스텝이었던 거예요. 관계를 이어가다가 그분들도 일손이 부족하니깐 제가 그림 그려주고 소품 만드는 거 도와주다가 그들과의 관계가 넓어진 거예요.”
인연을 이어가던 홍예슬 작가는 대학교 졸업한 후 연극을 더 배워보고 싶어 자연스레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공연 기획 쪽 일이 체계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일을 했다. 몇 군데의 기획사를 다녔었는데 홍보마케팅부터 디자인, 공연스텝 일 까지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우스갯소리로 배우 빼고 다 해본 것 같다고.
하지만 몸이 고단했던 시기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얼굴이 어둡지 않다. 작가의 연극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연극 하나 하나가 매일매일 다른 무대라고 말한다. 같은 대사를 치지만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애드리브도 하는 등 매일이 다른 모든 것이 재미있다며 애정을 보였다.
힘들었지만 즐거워했던 일을 어떻게 그만두게 된 걸까. 궁금했는지 배미정 작가는 무대 쪽 일을 하다가 언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거냐 물었다.
목표는 사라지고 쌓인 일만 처리하는 생활의 반복..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란 질문...
홍: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삶이 익숙해질 무렵 건강이 많이 나빠졌었어요. 쉬는 날조차 거의 없이 일하면서 언젠가부터 어떠한 목표를 위해 일하기 보다 내 앞에 주어진 쌓인 일들을 치우기에 바빴어요. 병원을 가게 되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홍예슬 작가는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 즐겨보던 프로에서 흘러 나오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 섰다. 20대 젊은 나이에 암선고를 받았다는 김수영 작가의 이야기였다. ‘당장 내일 죽을 수 있겠구나’란 깨달음에 김수영 작가는 꿈리스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예슬 작가가 느끼기에 그걸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홍예슬 작가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에겐 하고 싶은 일이, 이루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을.
그 길로 홍예슬 작가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김수영 작가가 쓴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은 작가는 노트 한 장을 하루 종일 붙들고 있다. 지금부터 내 삶을 산다면 뭘 하고 싶은 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림을 다시 생각했다.
얻은 1년, 내 마음대로 살겠다.
홍: “내 꿈은 무엇인가? 30년 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를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정리해보기 시작했어요.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보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해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해보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태어난 건 84년 12월인데 등록이 늦어져서 85년 2월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어요. 그 핑계로 엄마에게 난 1년을 얻었으니 1년간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아일랜드로 떠났죠.“
고개를 끄덕이며 홍예슬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배미정 작가는 ‘결단력이 대단하세요.’라며 놀라워했다. 이야기에 몰입한 듯 두 손을 꼭 잡은 채 상체를 앞으로 내민 배미정 작가는 아일랜드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홍: “일단 영어권이라는 것이 중요했고 단 한번도 유럽을 가보지 못했기에 주변의 다른 유럽국가들을 여행하고 싶었어요. 하루 이틀 동안 관광지를 보고 떠나는 여행말고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는 느긋한 여행. (웃음) 아일랜드에는 저가항공이 잘 되어있어서 엄청 저렴한 가격에 유럽국가들을 여행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공연 일을 하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도 가보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고 올 수 있었어요..”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시작된 1년간의 방랑에서 작가는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됐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의 생활비를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게 첫 시작이었다. 작은 종이에 먹으로 아일랜드 거리를 그렸다. 다행히 아일랜드는 버스커들의 천국이었다.
홍: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머물렀는데 자유롭게 시간을 쓰면서 용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어요. 버스커들 가득한 거리를 걷다가 그림을 그려서 팔아봐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붓이랑 먹을 친구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졸업 후 6년만에 다시 붓을 잡은 거죠. 한장한장 정성스레 아일랜드의 멋진 풍경을 그렸어요. 처음에 팔러 나갔을 땐 엄청 떨렸어요. (웃음)”
홍예슬 작가는 아일랜드에서도 작은 골웨이라는 도시에 살았다. 그 곳 사람들은 동양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많았다. 검은잉크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작가는 여백, 먹의 번짐 등을 설명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잠깐 지나가면서도 엄지를 들어보이거나 원더풀 뷰티풀 웃으며 작가를 격려해줬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그림을 본 값이라며 10유로를 그냥 주고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네스 맥주를 주고 가기도 했다고.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어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홍예슬 작가
누군가는 먼 길을 돌아온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홍예슬 작가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림을 그렸었는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지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배미정 작가도 그렇다. 배미정 작가는 미술을 늦게 시작했다. 타인과의 비교를 강요 받는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나는 그냥 내 속도대로 살아야겠다.’는 깨우침이 작가를 미술계로 입문하게 했다. 두 작가 모두 학부만 졸업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 다 주류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배미정 작가는 그 길에서 한발 물러나니 더 편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작가가 전공은 달라도 공통점이 무척 많다.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건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홍예슬 작가는 오랜 시간 미술을 공부한 자신에게도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보기엔 더욱 먼 문화생활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고. 이런 아쉬움은 남녀노소,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건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에서 1년을 지내면서 한글과 먹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외국인들이 제일 재미있고 아름답게 보는 부분이었거든요. 글자를 해체시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첫 작업은 제 이름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같은 글자, 다양한 의미....... 매력적이었다."
홍: “자기가 원하는 글자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넣어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안녕이라고 하면 사람들 마다 안녕은 다 다른 의미잖아요. 슬프게 느낄 수도 있고 밝고 경쾌할 수도 있잖아요. 스토리가 다 다르니깐 재미있더라고요. 미정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미정이라는 사람들은 다 다른 삶을 살았잖아요. 같은 미정으로도 다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런 게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중요한 단어들은 뭐지? 그런 단어들을 쓰면서 작업하게 된 거죠.”
전시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인 꿈 이야기는 실제 홍예슬 작가의 꿈 내용이다. 꿈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로 만들어 그 이야기에 들어가는 '꿈, 쉼, 만남, 우리, 삶' 등 단어들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를 보고 나면 그림책을 읽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한글날에 맞춰 전시하는 것은 새해에 새로 적힌 꿈리스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 남아있는 리스트엔 뭐가 있을까. 홍예슬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각 다른 예술로 표현하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홍: “글자를 저는 먹으로 표현했다면 다른 장르를 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글자 하나를 가지고 다르게 표현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 그림글자를 가지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구요. 그림책을 내고 싶기도 해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고민했던 작가는 이제 하고 싶은 게 많아 설레는 사람이다. 눈이 반짝반짝 거리며 자신의 소망을 얘기하던 사람에게 영감을 받았던 홍예슬 작가, 이제 작가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소망을 얘기한다. 배미정 작가는 자신도 절로 행복해진다며 ‘공간’을 주제로 진행되는 자신의 작품에 인터뷰이가 돼 주겠냐며 손을 내밀었다.
배미정 작가의 코멘트.
“분리되지 않음. 글자도 그림이고 그림이 글이 되고 전체를 통으로 보면 하나의 시처럼 다가오잖아요. 삶이 묻어나서 좋아요. 다른 사람 공간에 대해 인터뷰하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작업을 하거든요. 저도 인터뷰를 계속 하다보니 사람들 하고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공감이 됐어요. 소통하려는 마음이 느껴지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으로 나와도 좋을 거 같고. 기대할게요. “
각자 쌓아온 결이 만나 통하는 것이 많았던 두 작가님, ‘작가가 묻고 작가가 답한다’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글의 날을 맞아 진행되는 홍예슬 작가의 ‘한글로 그림’은 10월 28일까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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