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는 전시를 이어가는 작가들이 릴레이 형태로 다음 전시 작가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보는 프로젝트입니다.
뭔가를 치밀하게 그려내는 것, 그런 방식으로 내가 본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지희킴 : 권민호 작가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공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국에서 공부한 시간이 작가의 작업, 인생에 어떤 영향이었는지...
권민호 : 한국의 입시제도에 문제가 많다고들 하지만 나는 약간은 그걸 즐겼던 것 같다. 뭔가를 똑같이 그려내는 능력은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영국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들이 진부한 가치로 치부되고 생각이 중시되고 새로운 시도가 중시되었다. 그런 지점에서 혼란도 있었지만 오히려 재밌었던게 개념적인 작업, 실험적인 작업만이 꼭 가야될 유일한 길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답을 제시하는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이 갖고 있는 결을 보듬어줄 수 있는 교육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결, 즉 뭔가를 더 치밀하게 그려내는 것,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내가 본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념적인, 소위 말하는 모더니즘 이후의 작업들을 학생들이 흉내내려고 할 때 나는 반대로 갔던 것 같다. 그렇게 역으로 갈 수 있는 용기를 줬던 것이 영국 교육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나랑 같이 입시공부했던 애들이 갑자기 거기서 나고 자란 사람인양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심리적인 반발도 있었다. 힘있는 나라에서 체계적인 근대화, 산업화를 겪으며 만들어진 문화이기 때문에 영국 학생들에게는 여러가지 실험적인 것들,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는 그런 문화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왜 저런 조형과 시도를 따라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있었다.
지희킴 :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그동안 우리가 한국에서 했던 생각과 작업들이 그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산업화를 선도한 선진국이고 현대 미술의 중심에 있는 나라니까 그들이 다 맞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권민호 작가가 느낀 것 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을 갖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안에서 바꾸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거기에서 내 작업을 찾아가는게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지희킴 : 저우드 드로잉 프라이즈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어워즈인데 거기에서 수상을 했다니 반갑다.
권민호 : 나는 색을 입히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연필로 그리는 작업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을 작업의 최종 결과물로 상을 주고 전시하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 상을 탔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뀌진 않았지만 그래도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게 좋았다. 학부 졸업 작업으로 당선되었고 2014년도에 대학원 졸업작업으로 했던 작품 중 하나를 또 저우드 드로잉 프라이즈에서 전시했고 그게 운좋게 팔려서 비행기표를 사서 귀국했다.
현실의 엄밀함을 표현해내는 작업에 대한 동경
지희킴 : NPO 센터에서의 전시 방식이 특이하다. 연필로 굉장히 세세하게 트레이싱지 위에 건물이든 환경이든 표현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전시하는 방식은 거칠게 마스킹 테이프나 실핀으로 고정한다. 작업 방식과 전시 방식이 대비되는 느낌이다. 또 캡션을 직접 벽에 쓰는 방식이 특이하고 재미있다.
권민호 : 이번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업은 어찌 보면 완성된 형태의 작업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프로젝션 되어서 동영상으로 채색이 된다. 좀 더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을 만한게 뭔가 고민을 하다가 프로젝터를 사용해서 동영상과 빛을 입히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빛으로 색을 넣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번 NPO지원센터 전시에서는 작품마다 프로젝터를 사용할 수 없어서 도면만 디스플레이하고 덕수궁에서 전시한 석어당 작업을 모니터로 상영해서 느낌을 살렸다.
지희킴 :건축 도면이라는 작업 형식이 특이하다. 어떤 전시 방법이 어울리는지 고민이 많을 것 같다.
권민호 : 그래픽 디자인 전공 안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들을 주로 많이 했다. 다들 인쇄에 많이 관심을 갖고 실크스크린, 이소그라피, 에칭 등을 많이 했는데 나는 그런 쪽에 관심도 없고 돈 들어가는 그런 인쇄를 할 재정적인 여력도 안됐었다. 기계식 복사는 내가 채택한 도면이라는 양식과 잘 어울린다. 한국은 캐드로 바뀌어서 기계식 복사기가 없어졌는데 영국은 로우테크라서 도면 복사기를 아직도 사용하고 그런 복사기가 어디가든 있었다. 폭이 A0이고 길이는 그 롤이 다할 때까지 무한정이다. 인쇄 가격도 엄청 쌌다. 이미지 복사는 컴퓨터 스캔으로 재현하는 건데 기계식 텍스트 복사는 이미지를 받아서 태워내는 거라 질감이 다르다. 사실은 돈을 아끼려고 시도를 했는데 그 방식으로 했더니 느낌이 좋았다.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한 에이전시가 도면 그대로 걸지 말고 어떻게든 액자에 넣어서 팔 수 있는 형태로 아트페어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고민을 하다가 트레이싱지를 보드에 붙이는 드라이 마운트를 시도해 봤는데 마치 에칭처럼 보이면서 컨트라스트가 완벽하게 살아나는 거다. 드라이마운트 한 작품을 액자화 해서 아트페어에 참여했고 작품이 많이 팔렸다. 그게 큰 공부가 됐다. 아쉬운 건 그런 드라이 마운트를 시도할 수 있는 곳이 한국에는 없다. 그런 색감과 느낌을 낼 수 있는 종이도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다.
지희킴 :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는지
권민호 :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는 없다. 영화나 만화를 좋아하고, 형식적으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고 하는 건축가가 그린 도면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감상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실제 사람이 들어갈 공간, 목적이 있고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제적 공간을 그리는 그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현실성,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미지. 내가 그것과 정반대의 인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문학 중에는 김훈 선생 글을 좋아한다.스타일적으로도 멋이 있지만 형식이 가진 딱딱함이 좋다. 현실의 엄밀함을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지희킴 : 2017년에는 NPO센터 전시 외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권민호 : 지난 가을에는 <타이포 잔치> 의 기획자로도 참여했다. 기획자로만 끝내기가 너무 아쉬워서 아내가 쌍동이를 낳고 기록한 일지가 있었는데 그걸 소재로 작업을 해서 작품도 걸었다. 기획자의 역할을 하면서 덕수궁에서 진행한 야외 프로젝트와 시기가 겹쳐서 작품 준비를 따로 하느라 바빴다.
지희킴 : 본인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일러스트레이터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권민호 : 그게 굳이 구분되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약간 애매한 지점이 있는 게 좋기도 하다. 안타까운 점은 일러스트레이션도 하고 매체 기반 작업도 하고 전시도 하면서 바쁘게 작업하는데 내 작업에 대한 글로 된 비평이 너무 부족하다. 덕수궁 석어당 작업의 경우 거의 100만이 관람했다고 하는데 인스타에 올릴 사진 찍기 좋은 백그라운드 작품의 역할만 한건지 하는 회의가 든다. 한국의 산업화나 근대화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도 말 한마디 없다. 하다못해 저우드 드로잉 프라이즈 같은 경우는 학생 작업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어떤 작업을 했고 어떤 의미가 있고 이런 것들에 대한 짤막한 비평이라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백만이 관람했는데도 그런 게 없다.
지희킴 : 작업 자체가 낯설어서 그런 건 아닐까
권민호 : 낯설게 보는 것 같다. 내 작품에는 산업화 세대의 노고, 그들이 만들어낸 업적에 대한 긍정도 포함되어 있는데 정치적으로 선동적이지 않아서 주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조함이 좋다. sns 이용자나 정치 진영에서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작업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업자들이 그런 것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을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한다. 얘기하기 쉽고 확실하고 명쾌하니까.
낯설고 모호하고 건조한 정체성이 나의 무기
지희킴: 한 작품을 끝낼 때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나
권민호 : 작업 하나를 할 때 풀 타임으로 하진 않으니까 잘 모르겠다. 덕수궁 석어당 같은 경우는 폭이 5m 정도이고 영상 작업까지 프로젝션 맵핑을 했는데 한 달 정도 걸렸다.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채색이 안된 건물이라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다. 석어당의 구조도 위에 한국의 적산가옥, 포항제철, 명동성당, 연대 학생회관,현대 중공업 등 근현대사를 합쳐 놓았다. 원래는 밑그림을 없애고 애니메이팅 되는 것만 보여 주려 했는데 햇빛 때문에 빛이 선명히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배경을 살리고 프로젝션은 일종의 조명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했던 작업중에서는 덕수궁 석어당 작업이 규모적으로 가장 컸던 거 같다.
지희킴 : 예민한 작업인데 보관은 어떻게 하는지
권민호 : 복사기로 원본을 복사한 작업은 태우는 방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래지 않는다. V&A일러스트레이션어워즈에서 수상했을 때 수상한 작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종이 전문가가 종이의 보존성이 어떤지 검사를 하는데 그때 보관성이 더 좋다는 걸 알았다.
지희킴 : 전시 방식에 있어서 액자화 하는 작업, NPO에서 보여준 도면을 직접 벽에 붙이는 형태의 작업, 두 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는데, 작가로서 더 애착이 가는 디스플레이 방식은 어떤 것인지
권민호 : 사실 NPO센터는 장소적으로 지켜야 하는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시민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성격도 있지만 나무 벽이나 천장의 조명이나 각각의 요소들이 다 의미를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다. 이런 많은 향, 맛이 들어있는 공간보다는 완전하게 아무 향도 없는 공간을 더 선호하기는 한다. 설치 방식 자체는 공간에 어울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희킴 : 앞으로의 전시나 다른 계획은
권민호 : 코엑스에서 열리는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의 특별전에 전시를 하는데 석어당 작업을 실내 공간에 설치하려고 한다. 2월에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만화 형식으로 실험하는 사람들의 그룹전에 참여한다. 2018년에는 출판 작업을 3개 계획하고 있다. 194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도별로 드로잉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이 될 만한 산업들, 대표적인 건물들의 등장과 사라짐을 같이 보여주면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굉장히 큰 작업이다. 예를 들어 1969년도에는 한국 최초의 시립 아파트가 만들어졌고 현대자동차의 전신인 현대자동차 정비소가 생겼다. 또 보잉747이 시험 비행한 해이고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한 해이다. 한국으로 제한할 것인가, 세계사적 사건도 같이 곁들일 것인가도 고민이다. 그 중에 뭘 선택할 것인가는 작가의 주관이고 거기서 재미가 나올 수 있다. 어떤 걸 생략하고 어떤 걸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하는 데서 직관이 들어가야 되는데 너무 리서치에 연연하면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첫 이미지는 정했다. 1945년 사람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 한 채부터 시작하려 한다.책 세 권 중 하나는 엔진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내가 갖고 있는 느낌들을 최대한 살려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요소를 넘어서는 개연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싶다.
권민호
일러스트레이터. 설계 도면의 형식을 차용해 동, 서양의 근, 현대를 그린다. 특히,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 문화적 부산물을 소재의 팔레트로 삼는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와 왕립예술대학원(RCA)에서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드로잉과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매체작업과 순수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런던 Factum-Arte, Bompas & Parr, Jotta studio, RA등과 일했고, 저우드 드로잉 프라이즈, V&A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 런던 디자인 페스트발, 서스테인 RCA 등에서 수상했다. Korea Tomorrow 2015,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 2017 등에서 작업을 선보였고 타이포잔치 2017 책임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홍익대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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