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 선생님 강연 요약.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뭔가 꽃피지 못하고, 억울하고, 불평등하게 느끼게 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일단 두 가지 때문에(경제화&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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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문제에 대해서. 민주화 및 산업화가 이루어져 있기에, 최소한의 평등을 피통치자들이 요구하는 것.
너무 못 살면 자살률도 낮아지고 혁명도 안 난다.
어느 정도 살만하고, 합리성이 있는 상황에서 불만이 피통치자들에게 ‘의식되는 것’.
제가 보는 한국사회는, 힘든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는 데 안 힘든 사람들이 ‘괜찮다’고 말하는 사회.
힘든 사람이 힘들다면, 힘든 거지 안 힘든 것이 아님.
힘들다고 하면 ‘좌익’ 혹은 ‘종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 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철지난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근본문제: 우리의 고민을, 우리의 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론이 제출되고 실천방안이 제출되고, 이것이 검증 및 반증이 되어야 하는 데 그것이 없다는 것.
우리나라 모든 현실적합도의 이론은 오로지 서양이론이 지배함.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마르크스 혹은 푸코 혹은 들뢰즈가 되려는 사람이 없음.
학문용어 혹은 학문 자체에 의한 일상세계의 식민화.
학문은 원래 위대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나의 비루한 삶은 학문의 대상도 아니고, 실천의 대상도 아니고, 그건 운동하는 얘들이나 하는 거고, 나는 그런 것 모르겠고, 나는 이번 달 카드값이 급하고,, 이렇게 설정되어 있음. 내가 학교에서 배운 책에서 배운 내용, 새누리당, 녹생당에서 하는 이야기는 하는 사람들만 하는 이야기고 내 삶과 상관이 없다는 인식이.(널리 퍼져있음). 이것이 근본적인 소외.
이렇게 된 이유: 서양이 비서양을 지배함. 비서양에는 자기네 문제를, 자기네 말로 자기네 문제의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적어졌다’.
이퇴계, 율곡, 정약용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서 서서 설명한다. 일상생활과 학문과 분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 한다.
마치 데카르트, 헤겔, 마르크스, 들뢰즈처럼.
대한민국에서 자기이론으로 한국사회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학문의 식민화에 대해서 말할 때,
지배적 담론의 주류에서 밀려난 변방에서 살 때, 가장 비극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의 생각이 자기 생각으로 채워지지 못한다는 것.
나를 바라볼 때, 남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예컨대, 어떤 고등학생이 공부하기 힘들 경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음.
‘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고, 우리 집 어렵지도 않고, 나보다 훨씬 더 고생하는 친구들도 많은 데, 내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이것은 맞는 말인가? 이 생각은 자기 생각인가?‘ 자신이 고통스러운지 아닌 지 사람들이 정해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한국의 전통적인 외래사상 세 가지(유가, 불가, 도가) 모두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다 불신한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됨.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려던 의미를 읽어야지, 그 말을 잡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면, 매우 피곤한 인간이고 인격이 안된 것.
이는 동아시아사회가 몇 천 년 간 형성된 것이고 나쁜 것도 아님.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우리얘기를 우리말로 하려고 할 때, 도덕주의화, 개인주의화, 파편화, 심리학화시키면서,
너는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이 된 다음에 말해라라고 간다.
이것이 미쉘푸코가 1975년에 쓴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
궁극적으로 내면화되기에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
예컨대 노조를 할 경우에도, 자기 스스로 및 타인들이 이렇게 물어보는 것.
‘니가 과연 보편적인 대의를 위해서 나설 만큼 너의 인생을 살고 있냐?’라고 물어보면,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 마치 여성이 인권을 얘기하려고 할 때, ‘너는 남자관계도 깨끗하고, 돈 문제도 깨끗하고, 애도 잘 키우면서, 직장일도 잘 키우고..?’라고 묻는 것과 같음.
그래서 유교담론, 이 성리학 도덕주의담론이 비판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이론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처음부터 제거시키는 방식으로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음.
이것이 너무 오래되었기에 당사자들이 모름.
이것이 부르디외가 얘기하는 자연화, 당연화, 보편화임.
푸코가 말한 ‘파르에시아(고대 그리스인이 사용했던 말)’라고 ‘진심을 말하는 것’.
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용기. 물론 진심으로 믿더라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조건은, 말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
파르에시아의 두 가지 양상: 친구에게 제가 불편한 점을 진심으로 이야기 할 때, 상대가 그 말을 듣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역시 자기 생각 밖에 못하네?’라고 말할 수도 있음. 그런데 이걸 감수하는 것이 파르에시아라는 것. 이걸 꼭 해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 푸코의 얘기는 말하고 (상대방을) 안 보면 된다는 것. 요즘 베스트셀러 ‘미움 받을 용기’.
...
결론: 한국사회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말로 풀어내는 우리의 담론이 없다. 서양이론 밖에 없거나 고상한 이론 밖에 없음. 나의 지지고 볶는 시시한(술 마시면 안되는 데 술 먹고, 담배도 못 끊고, 돈도 규모 있고 못 쓰고, 효도도 못하고, 공부해야 하는 데 못하고..) 이런 나와, 공자, 맹자, 막스베버, 라깡...등과 따로 논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워낙 위대한 인간이기에, 질퍽거리는 비루한 나와 무관하다는 것이기에. 이 자체가 서양 학문에 의한, 대한민국 일상생활의 완벽한 식민화.
그러면, 내가 그렇게 느낄 때, 나를 못났다고 봐야하나? 그게 아님. 왜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라고 물어야 함.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했던 것처럼(서문에서, 요즘 젋은이들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들의 합리성이 이미 성숙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전통을 무시할 만큼 그들의 합리성이 성숙했다는 증거라는 것.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쓴다는 것.)
우리 시대에 자기 폄하에 사로 잡혀 있는 내가 있다면, 그 나는 인류사회에서 내가 이 사회를 바꿀 수 없었던 만큼, 이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에 종속되어 있고, 그 지배적인 담론이 나 자신을 계속해서 개인화, 파편화, 심리학화, 도덕주의화시키면서 혼내고 심판하는 구조로 설정되어 있는 것. 그런 담론으로 몰아가는 것.
내가 나를 바라보는 담론 자체가 사회이 지배적인 담론에 의해서 관리당하고 있음. 이걸 깨지 않으면, 우리는 꽃 필수가 없다.
한국사회는 언제 바뀔까? 안 바뀌면 망할 때. 나는 없애야 할 습관을 언제 없애는 가? 안 없애면 죽을 때.
역사를 보면, 기득권자들은 내놓지 않으면 죽을 때도, 내놓지 않아서 죽었다.
시위를 바라는 게 아니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
한국사회가 지금 살만하기에 안 바뀌는 것. 그렇다고 더 못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님. 한국사회는 굴러갈 만 하니까 굴러가는 것. 살만하니까 안 바뀌는 것.
그럼 과연 바뀐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스템을 바꾸는 것. 오류는, 시스템과 나를 대척점으로 보는 것.
세상이 안 바뀌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 이는 명백한 인식론적 오류. 왜냐하면, 남들이 보면 내가 세상이기에..
나를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세상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도, 세상 구조만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
내가 바뀌면 사회구조가 바뀌는 것. ... 개인화와 사회화 자체가 쌍둥이이고,
이런 구조의 틀을 깨는 것이 자기 인식에서의 변혁과 시스템의 아주 작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
회사에서, 주민센터에 가서, 자기 친구에게..말을 하는 것.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스캔들만 일으키고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고 자기만 희생자가 된다면 말을 안 하는 게 낫다.
한국사회의 진짜문제; 올바른 인식이 없기에 올바른 실천이 없다. 올바른 인식은, 자신의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얘기를 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연대를 하고, 제도를 바꾸고 대통령도 바꾸고..하지만 그것(제도와 대통령)이 바뀌어야 내 삶도 바뀐다는 것은 말이 안 됨. 어떤 특정 정당에 가입하거나, 이런 모임을 꾸려나간다든지..하는 것.
저는 민주주의가 아주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함. 내가 할 수 있는 데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말을 한 번씩 해보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 좋은 결과가 나오는 한도 내에서 약간씩 오버하고 실수하는 것. 물론 직장의 경우에, 회사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을 것. 내 얘기를 해보는 것. 저도 정리가 잘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 부탁받은 것이 처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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