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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빈곤 : 소비자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
작성자 : Wooyoung Park, 작성일 : 2015.08.08, 조회수 : 2594

 

*모임에서 언급된 흐름 위주로 PART1의 부분 발췌요약 입니다.

서론에 담긴 메세지 : 빈곤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빈곤한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회문제로 발생한다는 것과 그 현상들이 때로는 이미지화 되어 이용되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들은 존재했었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극빈한 상태의 사례나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의 대상화 된 이미지들이 주는 불편함들이 그러했다. 그것과 상대적으로 지금 우리 곁에서 발생하는 정규직의 절박함 주거문제 고립사까지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은 팽배하였지만 어쩐지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회적공감대로 절대 이어지지 않았다. 극빈한 대상들을 이미지화 하면서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무감각하지 않는가?란 물음이 이어졌다. 그것은 빈곤을 다루고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사회의 태도에 관한 불편함이었다. 이 책은 서론부터 그 불편함을 구조적으로 보게 끔 안내하고 있었다.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그들 ‘곁’에 있는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산과정에 모든 성인 구성원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과, 오랜 세월의 노동이 축적한 어마어마한 능력 덕택에 수많은 구성원들의 개입 없이도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똑같지 않다. 보편적 고용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가난한 것과, 평생의 계획이 소비와 선택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소비자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난날 ‘가난하다’는 의미가 실업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결함있는 소비자의 처지에서 그 의미가 비롯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지켜져야 하는 노동윤리


‘노동은 선이요 노동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혹은 일하는 것이 정상이며 실업의 상태는 비정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도록 사회가 어떻게 움직여 왔을까? 특히 장인과 농부로서 자기 리듬속에 일하던 시대의 사람들을, 기계가 등장한 이후 공장의 리듬에 맞춘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자본가들이 집요하게 움직여 왔는가?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기

공장의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근면하에 일해야 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였고, 장인에게 발휘되던 노동윤리와 근면적인 작업 태도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모순적이게도 장인의 ‘노동윤리(애정)’가 무너진 것은 공장 시스템이 도입 된 탓이었다. 다름 아닌 자본가들 자신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타인이 정하고 감독하는, 따라서 그 일을 하는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작업에 자신들의 기술과 노동 능력을 사용하도록 바뀌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맹목적인 훈련을 통해 노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빈곤층과 특별히 근면하게 일해야 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발적으로 게으른’ 이들을 일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과제이며 도덕적인 과제였다.


노동 윤리는 광범위한 도덕 및 교육 의제에 있어 중심 축 이었고, 근대의 시작을 찬미하는 이들이 ‘문명화 과정’이라 부르게 되는 핵심이었다. 이 문명화 과정에서 역사에서 처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해야 하는 것’보다 우위에 서게 되게 만들었다. 고유의 미션과 자기 주체성을 갖고 ‘해야 하는 것’을 안정감 있게 설계해 가던 장인들이, 고용될 수 있느냐의 기준에 맞추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능력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바뀐 것이다.


노동윤리의 조건

  1. 돈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노동에 따른 대가가 있을 뿐.

  2. 현재의 물질에 만족하여 쉬는 것은 무가치하다. 노동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있고 숭고함

노동윤리의 암묵적 가정

  1. 대부분 사람들은 팔만한 노동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대가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 노동은 모든 이들의 정상상태이고 일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이다.

  2. 노동은 급여를 받고 팔릴 수 있고 구매되기 쉬운 것 만을 의미한다.
    : 일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않고, 더 재미나고 괜찮은 할 일을 찾는 생활
    남부럽잖은 생활의 문턱은 낮았고 그 문턱이 지켜졌다.



노동이냐 타락이냐 : 열등처우, 감시 그리고 처벌

노동윤리를 주입하여도 환경의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존재하였다. 모든이들이 공장의 고된 노동을 감내하려 하지 않았으며, 약하고 병들고 나이 많은 병약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혹한 산업사회의 노동을 감당할 수 있지도 않았다. 노동에 참가하지 않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제거될 방안이 강구되었고 극빈층의 수를 확실하게 줄일 방법으로 열등처우와 구빈법이 등장하였다.


*열등처우 = 1820~30년 구빈법

열등처우란 임금이 아니라 원조 혹은 복지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생활조건이,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열악한 상태의 이들보다 나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일하지 않는 빈곤층의 삶이 더 열악하고 궁핍하게 형성되어어 노동빈곤층 (Working Poor)은 자신들의 삶을 훨씬 나은것으로, 더 견딜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지탱되는 삶이라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1820~1830년 구빈법 개혁가들의 의식을 사로잡았으며 빈곤층을 수용하는 구빈원 내부의 환경을 ‘진정한 극빈층’ 말고는 아무도 입소하고 싶지 않게 형성하게 되었다. 칙칙하고 궁상스러운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원조한 효과는 두가지 였다.

  • 빈곤층 스스로의 자기 검열 : 정규노동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서 극빈층으로 위장했다고 의심되는 이들로부터 진정한 극빈층의 분리. 극빈층 스스로 자기검열의 시작

  • 가장 쥐꼬리만한 임금과 가장 힘들고 지루한 공장의 노역도 비교적 견딜만한 것으로 여겨짐


* 파놉티콘 : 근면성을 유지하는 감시망

그 이후 근로시설, 노역소, 구빈원, 공장, 감옥, 정신병원 과 학교의 시설들을 유지하는 제도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다. 모든 시설들은 다양한 인간적 습성과 경향들을 중화 또는 무력화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한가지 행동 양식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제러미밴담은 그러한 획일성이 가능한 건축양식인 파놉티콘 시설을 설계하였다.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전체 구성원을 감독할 수 있는 감옥시설을 제안한 것이다. 공장이나 군대와 같이 획일성이 유지되는 힘은 ‘파놉티콘 시설’이었고, 이 체계의 일터에서 노동을 하며 길들여진 남성들은 감독관과 같은 사회적인격을 형성하였다. 고된 공장의 노동을 감당할 수있는 남성의 건강은 절대적이고 넘볼 수 없는 통치자로 여성과 아이들을 향해 가부장적 가정을 형성하게 된다.


 

‘더 나은 것’ 에서 ‘더 많은 것’으로

노동 윤리는 도덕적 책임감을 삶의 양식과 교육등을 통해 호소하였지만, 기계에 맞춘 신체활동 리듬을 만들며 무조건 복종하게 만드는데는 실패하였다. 결국 생산자(장인)로서 가지고 있던 의식들이자 공장노동으로 연결되지 않자, 근대조직들은 노동과 도덕적 감성이 무관한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노동은 사랑받을 필요도, 도덕적 고결함의 징표로 이해될 필요도 없었다.

노동은 공개적인 불평의 대상이었지만 규율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가장 고통스러운 조건조차 멀지 않은 자유라는 행복을 위해 일시적으로 지불해야 할 대가로 받아들여 졌다. 아메리칸 드림의 가능성 조차 희박해져가는 상태에서 다른 수단은 ‘물질적 동기’에서 발견되었다. 성실한 노동은 남들보다 잉여의 과실을(임금격차) 더 많이 보유할 수 있다는 수단으로 선전되었다. 도덕적으로 삶의 주체성을 이야기하며 자율과 자유 갈망하는 ‘더 나은 것’은 잊게 되었고, 단지 ‘더 많은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잉여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능력이, 장인들이 공장노동자로 바뀌면서 사라진 인간의 존업성을 회복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되돌릴 수 없이 분명하게 소비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계급사회는 붕괴되었지만 계급의식은 잔존하며 지금으로 넘어왔다. 그 안에서 개개인들은 '모멸감'을 느낀다.
라고 모멸감 저자 김찬호 교수는 이야기한다. 새로운빈곤에서는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해서 도시와 공장안에
사람들을 근로자로 호출하였던 산업사회에서, 더이상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기술의 진보와 지식산업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하지만 일하는 자만이 먹을수있다는 '노동윤리'만이 교묘하게 남아서, 현재 개개인이 존엄함을 느끼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의 일이라도 기꺼히 하도록 감수하게끔 한다.

 


 
 


작성자 : Wooyoung Park, 작성일 : 2015.08.08, 조회수 : 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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